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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문 열렸다” 49도 폭염에 정전…독재자 몰아낸 이곳 또 발칵

중앙일보

2026.08.05 22:32 2026.08.0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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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말 ‘아랍의 봄’을 촉발해 아랍권에서 유일하게 민주화에 성공했던 나라 튀니지에서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혁명의 불씨를 되살렸다. 시민들은 전국적 정전과 단수를 더는 못 버티겠다며 15년 전 독재자를 몰아냈던 거리로 다시 돌아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튀니지 수도 튀니스 도심에서 시민들이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튀니지 수도 튀니스 도심에서 시민들이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49도 폭염에 전력수요 사상 최대

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수도 튀니스의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에 수천 명이 모였다. 시위대는 “전기도 없고 물도 없다. 감옥과 고물가만 있다”며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2011년 혁명 당시 독재자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를 몰아낸 구호인 “국민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도 다시 등장했다.

튀니지 공화국 선포일인 이날은 사이에드 대통령이 의회를 무력화하고 권력을 장악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야권이나 민주화 운동가가 주도하던 기존 반정부 집회와 달리 정전과 단수로 신음하는 시민들이 시위에 앞장섰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지난달 중순 시작된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일부 지역에선 기온이 섭씨 49도까지 올랐다. 에어컨 사용이 급증하자 낡은 전력망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국영 전력·가스공사(STEG)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최대 전력 수요는 사상 처음 6000㎿에 달했지만 실제 가동할 수 있는 발전 능력은 4200~4400㎿에 그쳤다. 전체 수요의 4분의 1 이상인 약 1600㎿가 부족했던 것이다.

당국은 전국적인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로 지역별로 전력을 끊었다. 정전은 일부 지역에선 24시간 넘게 이어졌다. 단수와 통신 장애도 잇따랐다. AFP통신은 “신이 지옥 문을 연 것 같았다”고 현지 민심을 전했다.

인명 피해 규모는 공식 집계되지 않았지만 열사병과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인원이 150~200명으로 추정된다. 정전으로 냉방을 할 수 없었던 가정과 병원에서 고령자와 만성질환자의 피해가 컸다고 튀니지 젊은의사기구(OTJM)는 현지 매체에 설명했다.



독재자 몰아냈지만 생활고는 그대로

이번 사태를 놓고 민주화에 성공한 튀니지가 정작 먹고사는 일의 혁명에는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도시 시디부지드에서 노점상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 단속과 모욕에 항의해 분신하면서 시작됐다. 시위는 실업, 부패, 정치적 억압 등을 향한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23년간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은 다음해 1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다.

튀니지의 시위는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등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대부분 군부 통치나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튀니지는 이들 국가와 달리 자유선거와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4년에는 대통령과 의회가 권력을 나눠 갖는 새 헌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노동계·법조계 등 4개 시민단체로 이뤄진 ‘국민대화 4자기구’는 정치적 충돌을 대화로 풀어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다. 혁명 이후 10년 동안 정권과 내각이 끊임없이 교체됐고, 정당 정치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로 양분됐다. 힘이 약한 연립정부는 개혁에 번번이 실패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민들이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민들이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경제난 파고든 1인 독재…대통령은 남 탓

이런 틈을 사이에드 대통령이 파고들었다. 헌법학 교수 출신으로 무소속 정치 신인이었던 그는 검소한 이미지를 내세워 2019년 대선 결선에서 7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기존 정치권을 심판해 달라는 민심이었다.

정권을 잡은 사이에드 대통령은 2021년 7월 국정 마비와 코로나19 대응 실패를 이유로 군을 동원해 의회를 봉쇄했다. 친위 쿠데타라는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경제난 해결에 대한 기대로 1인 통치 체제가 완성됐다. 그는 포고령으로 국정을 운영하다가 2022년 의회를 해산한 후 개헌을 통해 행정부 구성권, 의회 해산권, 판사 임명권 등을 독점했다.



국가 붕괴 보여주는 지표…등 돌린 청년층

민심 이반이 감지된 건 2024년 대선이었다. 사이에드 대통령은 90.7%를 득표해 재선했지만 투표율은 28.8%에 그쳤다. 주요 경쟁자들이 투옥 등으로 출마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이에드 대통령은 이번 정전에 대해 사보타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검찰은 전력·수도 담당 공무원들을 상대로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하지만 친여 성향 의원들까지 사이에드 대통령에게 냉담하다. FT는 “투자 부족, 재정난, 노후 설비 등이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며 “의회에선 정부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재 시위를 제2의 아랍의 봄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참가자는 수천명 수준에 불과하고 야권도 분열돼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년층이 시위를 주도하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2021년 권력을 장악했을 때 지지층이 돌아선 현상이 심상치 않다는 의미다. 리카르도 파비아니 국제위기그룹(ICG) 북아프리카 담당 국장은 FT에 “핵심 문제는 튀니지의 공공서비스가 점진적으로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이러한 악화가 국가 전반의 쇠퇴를 상징하는 대리 지표가 됐다”고 말했다.



이근평([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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