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웬만한 기업은 법인이 회사 자산을 소유하는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제노바 지역에서 초기 주식회사들이 만들어졌고,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의 동인도회사들이 거대 주식회사로 발전했다. 주식회사가 자본주의의 동력으로 활동한 지 이미 700년가량이 흘렀다.
20세기 초반의 사상가 니콜라스 버틀러는 주식회사가 “현대에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발견”이라며 “스팀엔진이나 전기 등의 기술적 성취도 주식회사 없이는 상대적 발기부전에 빠졌을 것”라고까지 단언한 바 있다. 주식회사가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대규모 장기투자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목표는 장기 존속
유동성 좇는 주식시장과 갈등
당국의 상법 개정·유상증자 개입
소수 주주들의 행동주의 부추겨
자금공급 없으면 기업 성장 못해
기업·시장 공생 위한 정책 전환을
장기투자의 기반은 영생(永生)할 수 있는 법인이 기업의 모든 자산을 갖고 무한 책임을 지며 경영하는 데 있다. 사멸(死滅)하는 자연인이 자산을 소유하면 세대가 바뀌면서 쪼개지든지 없어진다. 반면 법인은 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고 주주만 바뀐다. 금융기관들은 따라서 법인의 자산이나 경영 상태에 초점을 두고 장기자금을 공급할 수 있다. 경영인들은 법인과 계약을 맺고 기업의 장기 존속과 번영을 책임지는 경영수탁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김경진 기자
법인 ‘무한책임’, 주주 ‘유한책임’ 한편 주주들은 유한책임을 지기 때문에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투자한 돈만 손해 보고 다른 개인 재산은 지킬 수 있다. 위험을 나름대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주식은 쉽게 매매될 수 있기 때문에, 즉 유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산 운용에 편리하다. 이에 따라 주주 입장에서는 회사에 돈을 투자하는 데 많이 자유로워지고, 회사 입장에서는 자금을 조달하기가 수월해진다. 경영에 대한 법인의 무한책임과 주주의 유한책임은 주식회사를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 만든 두 가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회사 제도는 장기존속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기업이 생존하려면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고객을 만들고 지켜야 한다. 그런데 혁신은 확률이 낮은 일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 결정을 ‘민주적 절차’에 맡길 수 없다. 평균이 동의하는 것은 혁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경험과 실력을 갖춘 엘리트들로 구성된 이사회에 경영의 전권을 주고 다른 직원들이 명령에 따르는 위계조직으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사회의 경영 전권에 대해 커다란 혼동이 있다. 주식회사 원리를 모르고 주식투자에 뛰어든 많은 사람이 주주총회가 이사회 위에 있는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주가에 문제가 생기면 주총에 회부하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전 세계 상법은 이사회가 최고의사결정 기구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주총에는 이사 선임 및 해임 등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결정권을 준다.
만약 주총이 최고 의사결정 기관이라면 이사회 결정을 번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사회는 고유 권한을 가진 주식회사의 독립된 기관이므로 그 권한에 의하여 결의한 사항에 대하여는 주주총회의 결의로 번복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고 확립해 놓았다. 이사회 결정에 불만이 있으면 주총에서 이사진을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문제 제기를 반영할 수는 있어도 이사회 권한을 주총으로 갖고 올 수는 없다. 법인이 무한책임을 지는 회사의 주인이고 주주(株主)는 유한책임을 지는 ‘주식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주주의 권리에 대한 오해는 폭넓게 퍼져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네이버 사전은 주주를 “주식을 가지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이나 법인”이라고 잘못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한 원인은 주주 중에서 경영 참여 주주와 일반주주(소수 주주)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데서 비롯된다.
흔히 ‘오너 경영자’라고 불리는 대주주경영인들이 대표적인 경영 참여 주주다. 그러나 이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대주주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문경영인들과 마찬가지로 법인과 계약을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영인으로서의 역할과 대주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에 따라 이들은 ‘유한책임’이 아니다. 회사가 잘못되면 경영인에 준하는 책임을 진다. 또 대주주로서 경영 감시 및 소수 주주 보호책임도 진다. 기업이 잘못됐을 때 대주주에게 ‘사재출연’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소수 주주들은 투자금을 잃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완전 ‘유한책임’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금융당국이 ‘5% 룰’을 사용하면서 소수 주주와 대주주의 경계선을 긋는다. 소수 주주는 내부정보도 없고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서 아무 제한 없이 주식을 거래할 수 있다. 그러나 대주주는 내부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공시 의무나 거래 금액에 제한을 받는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하이닉스 주가가 급락했을 때 “책임경영을 실천한다”면서 48억원어치 주식을 매입한 것도 이러한 대주주 규제 때문이다. 50억원 이상의 주식을 매입할 때는 30일 전에 공시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으니까 공시의무가 없는 거의 최대액까지 매입한 것이다.
주주 ‘경영 참여’는 오해 주주가 ‘경영 참여’를 한다는 오해의 두 번째 원인은 1980년대 이후 소수 주주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경영진에 영향력이 커진 현상을 확대 해석한 데서 비롯된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소수 주주들이 경영에 영향을 미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이들 사이에서 확립됐던 관행은 ‘월가(街)식 퇴장(Wall Street Walk)’이다. 회사가 싫으면 주식을 팔고 떠나는 것이다. 대체로 투자대상을 잘못 골랐다고 ‘내 탓’을 했지 ‘남 탓’을 별로 하지도 않았다. 굳이 경영진에 영향을 미친다면 매도를 통해 주가 하락으로 ‘응징’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미국에서 주주 가치론이 등장하고 행동주의가 강화되면서 소수 주주들이 경영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자사주매입이다. 전통적으로 ‘주주 지급(payout)’은 배당이었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는 거의 전액이 배당이었다. 하지만 자사주매입이 계속 많아지면서 지금은 자사주매입률이 60%대로 배당률을 훌쩍 뛰어넘었다(그림). 그리고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인 양 내세워지고 한국도 자사주매입을 미국처럼 많이 해야 증시가 좋아진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경진 기자
하지만 자사주매입은 단기투기꾼에게만 도움을 준다. 그동안 수많은 실증연구가 이루어졌어도 자사주매입이 중장기 주가를 올리는지 검증하지 못했다. 단기 주가를 올린다는 사실만 확립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이 시장에서 자사주를 매입하는 동안 수요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자사주 매입을 ‘주주환원’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환원’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한 뒤 주주가 이득을 얻으려면 적절한 때 주식을 팔아야 한다. 회사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다른 주식매매와 똑같은 일이다. 게다가 그 이득은 주주이기를 그만둘 때 얻는 것이다. 배당은 주주로 남아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환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별 시점을 잘 결정하는 사람이 얻는 이득에 대해 어떻게 ‘환원’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나?
금융당국 유상증자까지 개입 자사주매입은 기업이 장기번영공동체라는 정신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영진이 자사주매입 압력에 넘어가는 이유는 소수 주주들의 힘이 막강해졌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은 그동안 유동성을 추구하면서 기업에 자금을 공급해주는 발행시장보다 거래 차익을 목적으로 주주 간 손바뀜이 일어나는 유통시장이 대폭 커져 있다.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초에는 유통시장이 발행시장보다 30배가량 컸는데, 지금은 400배에 가깝다. 한국은 10배 내외였는데 지금은 200배가량에 달한다. 기관투자자들이나 헤지펀드·개인투자자들은 대부분 유통시장에서 활동한다. 이들이 연합해서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창구도 대폭 강화되어 있다. 한국은 상법개정까지 하며 행동주의를 지원하고 기업의 유상증자 결정에까지 금융당국이 개입한다.
하지만 기업과 주식시장이 한 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기업에 필요한 자금공급이 원활해지고 자금을 공급한 주체들이 유동성과 이익을 확보하면서 공생한다. 시장이 기업에 자금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고 보유자금을 빼내는 데만 집중하면 갈등이 커지고 기업이 제대로 클 수 없다. 기업과 주식시장이 함께 성장하는 틀을 잘 만드는 쪽으로 기업정책과 금융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