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욕망이 넘쳐서가 아니라 욕망이 빈곤해서 병들어 있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원하며 살지만 무엇을,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지는 배운 적이 없다.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이 공백을 파고든다. 광고는 알지 못했던 결핍을 제조하고 시장은 그 결핍을 채울 상품을 판다. 소유가 늘수록 공허도 늘어나는 셈법 속에서, 인간은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제조된 욕망의 소비자로 전락했다.
듀크대학교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그의 대표작 ‘성품의 공동체(A Community of Character)’에서 신앙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인간은 규칙을 따르기 전에 ‘이야기’로 빚어지는 존재다.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성공 신화를 들으며 자란 아이와 십자가 사랑을 들으며 자란 아이는 서로 다른 것을 갈망하며 산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세월 몸에 새겨진 ‘성품’이 결정하며, 성품은 우리가 속한 이야기와 전통이 빚는다.
소비문화 역시 하나의 강력한 이야기다. “너는 네가 소유한 것이다”라는 서사가 광고와 쇼핑이라는 반복 의례를 통해 우리 몸에 탐욕과 조바심, 비교의식이라는 뒤틀린 성품을 새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하우어워스는 단언한다. “교회는 사회윤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사회윤리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로 사람을 빚어내는 대안 공동체이며, 덕은 홀로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내와 소망, 정직과 사랑 같은 그리스도인의 덕은 마치 모국어처럼, 그 덕을 살아낸 성도들의 전통 안에서 함께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며 짐을 지는 공동체의 오랜 훈련을 통해서만 몸에 스며든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더 나은 소비 윤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욕망으로 빚어진 사람들의 존재 자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를 증언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사도의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닮음을 향했다. 세상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그의 회심은 신념의 교체가 아니라 욕망의 회심이었다.
자녀에게 성공 신화만을 물려주고 싶은 이민 사회의 유혹 앞에서, 바울의 욕망은 여전히 도전한다. 소비의 욕망은 채울수록 허기지지만,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망은 비울수록 오히려 충만해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핵심 질문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에 앞서 “나는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성품으로 빚어지고 있는가”이다. 소비사회는 오늘도 속삭인다. 더 가지라고, 더 오르라고, 그것이 곧 당신이라고.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초대장을 내민다. 참된 것을 욕망하는 백성이 되라고, 십자가의 이야기로 빚어진 성품으로 살아가라고. 그 초대에 응답하는 자리는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매주의 예배와 성찬, 서로의 짐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닮아가고, 우리가 속한 이야기대로 살아간다. 참된 것을 욕망하도록 서로를 빚어가는 공동체, 그것이 소비의 제국 한복판에 세워진 교회의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