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새벽바람이 게 눈 감추듯 숨어 버리면, 따가운 햇살은 밤새 참아 온 열기를 쏟아붓는다. 여름 햇살은 절약이라는 미덕이 없다. 마지막 한 줌까지도 노을에 담아 쏟아내고야 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더위에도 숟가락은 놀려야 하기에 점심을 해결하러 식당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 냉수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냉면으로 더위를 이기고 있었다. 주문하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어, 시원하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삼계탕 국물을 넘기신 어르신이 흘리시는 탄성이었다. 더위를 더위로 이기는 이열치열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탄성 속의 ‘시원하다’는 이열치열에서 온 말이 아니었다.
사실 ‘시원하다’는 본래 차갑다는 뜻에서 온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더위의 반대말도 아니다. 옛말 ‘싀훤하다’의 ‘훤’은 ‘훤하다’와 같은 뿌리라고 한다. 막히지 않고 탁 트였다는 뜻이다. 막힌 마음을 탁 트이게 하니 시원한 것이다.
게다가 이열치열도 본래 열을 더 큰 열로 다스린다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 말은, 역적을 처리할 때 같은 당파에 맡기면 피를 덜 흘린다는 데서 왔다고 한다. 대립이 아니라 관용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즉 뜨거운 것을 더 뜨거운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에 공감하여 이를 어루만지고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이 참된 이열치열이요, 그래서 탁 트인 시원한 이열치열이다.
뜨거운 국은 뜨거워서가 아니라 답답하고 찜찜한 속을 탁 뚫어 주니 시원한 것이다. 세상에 찌든 복잡한 마음을 뜨거운 온천에 풀어 버리니 시원한 것이다. 우리는 무더위를 먹는다. 무더위는 더 심한 더위가 아니라 찌는 듯한 더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국물도 차가운 얼음도 아닌, 시원함이다.
우리가 먹고 찌들게 된 것이 더위뿐인가. 우리는 욕도 먹고 돈도 먹고 뇌물도 먹는다.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더 돈을 먹고 성공을 더 먹으라고 한다. 그것이 세상의 이열치열이다. 더 큰 성공이 거짓을 덮고, 겉으로 드러난 더 큰 권세가 불의를 덮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것이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거친 길도 평탄하게 되는 후련함이다. 더 큰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먹고, 욕이 아니라 용서를 먹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먹는 시원함이다. 여기 놀랍게도 “나를 먹으라” 하시는 분이 있다. 바로 생명의 양식이시요, 후련하게 탁 트인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