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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감잣국을 쏟아도 좋은 나이

Los Angeles

2026.08.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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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어제 저녁, 감잣국을 끓였다. 몽글몽글 피어나는 김 속에서 익어가는 감자의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국물은 넉넉했고 감자는 알맞게 푹 익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냄비의 온기와 보글보글 끓는 소리까지 저녁 준비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남편이 식탁에 앉은 후 국을 뜨다가 그만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국을 담으려 집어 든 그릇은 국그릇이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둥근 나무 받침대였다. 눈앞에는 분명 멀쩡한 국그릇이 있었건만 왜 그걸 못 봤을까. 감잣국이 구멍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뜨거운 국물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며 “앗 뜨거!” 하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식탁 위는 흥건해졌고 조금 전까지 완벽했던 저녁 풍경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황당했다. 남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그걸로 국을 받으면 손가락이 먼저 식사하겠네.” 남편은 농담 반 걱정 반의 눈빛으로 얼음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날 우리의 웃음은 저녁의 온기처럼 오래도록 식지 않았다. 칠십 대 후반까지 수천 번 넘게 국을 끓여왔건만 받침대에 국을 부은 건 처음이었다.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자꾸 웃음이 났다.
 
며칠 전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냉면 육수를 만들려고 정성껏 고기를 삶아 국물을 식히려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어 하얗게 뜬 기름을 체에 부어 걸러내려 했다. 그런데 그만 체 밑에 그릇을 받쳐두는 걸 깜빡한 것이다. 기름을 빼려던 순간 귀한 고기 육수가 체를 통과해 싱크대 배수구로 쏟아져 내렸다.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는 친구의 고백에 나는 “어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며 놀랐지만 속으로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며칠 뒤, 내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친구의 ‘육수 실종’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감잣국 실종’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친구가 나였고 내가 그 친구였다. 서로의 실수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내가 알던 과거의 ‘나’와 조금씩 멀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 기억력은 떨어지고 순간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사소한 실수가 점점 늘어난다. 한순간 당황하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잦아진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위안이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여유다.
 
뜨거운 감잣국보다 더 따뜻했던 건 내 실수를 너그러이 웃어준 남편의 눈빛과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패담을 꺼내 함께 웃어준 친구의 목소리였다. 쏟아져버린 국처럼 허탈한 순간도, 육수가 사라진 아쉬운 기억도 나누고 나면 그저 다정한 웃음으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늙어가는 맛이다. 진하게 우러난 삶의 경험이 실수와 허탈함까지도 감싸 안으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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