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말, 이재명 정부는 반도체,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라는 3개 분야에 약 1500조 원을 신규 투자하겠다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대기업의 기존 투자까지 합하면 5000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투자 구상이다. 정부는 이 세 분야를 AI 시대의 ‘삼각 축’이라 부르며 이를 통해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AI 혁명이 초래할 역사적 변화에 대응하려는 정부의 정책 의지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 삼각 축은 AI 시대의 결정적 승부처를 정확히 읽지 못한 채 균형을 잃었다. 신규 투자 중 반도체에만 900조 원 이상, AI 데이터센터에 550조 원이 집행되는 반면, 피지컬 AI 관련 투자는 민관 합쳐 20조 원 안팎에 불과하다. 피지컬 AI의 막대한 잠재력을 고려할 때 정부 구상은 과거의 관성에 갇힌 듯하다.
정부의 3대 메가 프로젝트 구상
경제 전체의 생산성 개선엔 한계
산업 전반으로 파급될 피지컬 AI
범용지식 창출할 인재가 승부처
반도체로써는 국가 경제의 최대 과제인 잠재성장률의 하락 추세를 되돌리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생활 수준을 향상하는 힘은 같은 자본과 노동으로 더 많은 가치를 만드는 능력, 즉 생산성이다. 그런데 한국의 생산성은 독일의 3분의 2 수준에 그친다. 세계 최고의 메모리 공장을 가진 한국의 효율성이 왜 같은 제조업 강국인 독일보다 크게 낮을까. 메모리 가격 폭등이 가져오는 일시적 이익과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 경제성장론이 강조하듯, 혁신은 특정 부품이나 단일 산업의 호황이 아니라, 산업 전반으로 파급되는 기술개발과 범용지식의 축적에서 나온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 절약하고 더 길게 일해야만 겨우 버티는 ‘투입 중심 경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도체 투자는 지속해야 한다. 지정학 격변기에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품이 아니라 경제안보의 핵심 자산이다. 첨단 메모리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초크 포인트’다. 호황기에는 막대한 현금흐름과 세수, 투자 여력도 제공한다. 또 AI 시대의 메모리 경기 사이클은 과거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 성장전략 전체를 메모리 중심으로 설계하면 나라의 운명이 한 산업, 그것도 좁은 기술에 의존하는 위험한 상태가 된다. 특정 제품과 산업에 국운을 거는 산업정책은 기술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중국의 추격이 거센 지금, 국가 경제 전체를 극심한 변동성에 내던지는 것과 같다.
피지컬 AI야말로 한국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핵심 열쇠다. 한국은 선진 민주국가 가운데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철강, 전자, 방산을 아우르는 폭넓고 정교한 제조 생태계를 갖춘 보기 드문 나라다. 제조업 기반 AI의 핵심은 로봇과 센서, 공정 데이터, 숙련 엔지니어, 그리고 실제 생산 현장을 결합해 기계를 학습시키고 성능을 계속 높이는 데 있다. 한국은 이 동태적 학습에 매우 유리한 거점이다. 이 기술이 한 산업을 넘어 다른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파급된다면 그 생산성 개선 효과는 특정 제품과 대기업만의 호황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이처럼 피지컬 AI는 경제 전반의 체질을 바꿀 절호의 기회다.
제조업 기반 AI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도 높인다. 반도체 메모리 공급국을 넘어 AI로 반도체와 실물 산업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국가가 훨씬 강력한 지정학적 지렛대를 갖는다. 한국이 피지컬 AI 기반의 제조 거점 역할을 해낸다면 민주주의 진영 내 한국의 안보·경제적 가치는 독보적인 수준으로 높아진다. 미국 등 우방국이 한국의 AI 로봇을 수입해 제조 현장을 맡기는 중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반면 한국이 뒤처지고, 중국이 거대한 제조업 기반에 AI와 로봇을 결합하면서 기술표준과 공급망까지 장악한다면, 한국 제조업도 중국의 AI 플랫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중국이 피지컬 AI의 유일무이한 승자가 된다면, 세계 경제, 나아가서는 지정학적 판도가 중국 쪽으로 급속히 기울 것이다.
정책의 정점은 인재 유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범용기술을 개발해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을 일으키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미국 등 여러 국가의 대학과 연구소가 재정 부담으로 신규 채용과 연구 인력을 줄이는 지금이 좋은 기회다. 지금 세계에서 세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는 선진국은 한국 등 소수에 불과하다. 국가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다듬어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 환경을 대폭 개선하고, 3~5년 이상 안정적으로 고용할 박사후연구원과 중견 학자들을 전 세계로부터 대거 유치한다면 잠재성장률 제고를 위해 이보다 가성비 높은 투자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성장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공장을 짓는 데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전략만 반복하면 어느 순간 창조적 파괴에서 ‘창조’하는 주체가 아니라 ‘파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제 정부는 피지컬 AI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제고하고, 인재를 키우고 지키고 끌어오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한국에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여기가 한국 경제의 진짜 승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