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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현대사 풍파 온몸으로 맞은 개혁 전도사…주룽지 前총리 별세

연합뉴스

2026.08.12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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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파운동·문화대혁명으로 고초…덩샤오핑 낙점으로 경제 사령탑 맡아 사회주의 시장경제 기틀 놓고 WTO 가입 협상 주도…국유기업 개혁은 실업자 양산도
中현대사 풍파 온몸으로 맞은 개혁 전도사…주룽지 前총리 별세
반우파운동·문화대혁명으로 고초…덩샤오핑 낙점으로 경제 사령탑 맡아
사회주의 시장경제 기틀 놓고 WTO 가입 협상 주도…국유기업 개혁은 실업자 양산도

(베이징=연합뉴스) 정성조 특파원 = 12일 별세한 주룽지(朱鎔基·1928∼2026) 전 총리는 당대 중국에서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국 현대사의 격동으로 실각과 복권을 거듭한 끝에 중국 경제를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고,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오늘날의 경제대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고인은 1928년 남부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가 출생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9세 무렵에는 모친까지 잃어 백부의 손에 자랐다.
'신중국'(新中國·1949년 건국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인 1947년 명문 칭화대에 입학해 전력기계 제조를 전공했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1년 대학 졸업 후 동북인민정부와 국가계획위원회(현재의 국가발전개혁위원회)에서 경력을 쌓던 그는 반우파운동(1957∼1958년)과 문화대혁명(1966∼1976년)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풍파에 휘말리게 된다.
1957년 당의 '정풍운동' 지침에 따라 그가 국가계획위원회 안에서 제시했던 의견은 몇 달 안 가서 도리어 '우파 분자'로 분류되는 근거가 됐다. 그는 강등당한 뒤 1962년까지 일선에서 밀려났다.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업무에 복귀했으나 곧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문화대혁명은 정부 부처들이 두루 타격을 입은 시기였고, 그는 1970∼1975년 집단농장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주 전 총리가 경제 관료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완전히 재기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주도로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이다.
그는 1979년부터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경제위원회에서 연료동력국 처장(과장)과 종합국 부국장, 기술개조국장, 국가경제위원 등으로 승승장구했고, 부국장(당조 부서기)까지 승진한다.
그는 1987년 상하이로 거점을 옮겨 당 부서기 겸 시장이 됐고, 훗날 장쩌민 전 국가주석(당시 상하이 당 서기)과 함께 중국 최고 지도부를 이끌게 된다.
상하이 시절 주 전 총리는 덩샤오핑 노선을 따르는 핵심 세력으로 올라섰고, 상하이의 푸둥(浦東) 지역 등의 인프라 건설과 경제 개혁,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중국 안팎에선 덩샤오핑이 주 전 총리를 차기 지도자로 낙점한 것이 이 무렵이라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덩샤오핑은 1988∼1994년 매년 상하이에서 춘제(설날)를 보냈고, 주 전 총리는 1988∼1991년 모두 네 차례 덩샤오핑을 직접 맞이했다.
상하이의 발전상을 본 덩샤오핑은 주 전 총리에 신임을 보내면서 푸둥 개발과 금융 개혁 등에 힘을 실어줬다.
주 전 총리는 덩샤오핑의 정치적 경호를 맡았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잇따라 무너지는 상황에서 개혁·개방을 되돌리려는 중국 보수파의 공세에 맞서 덩샤오핑을 적극 옹호했다. 이후 덩샤오핑의 남부 시찰(1992년) 등으로 여론이 개혁·개방의 손을 들어주면서 보수파의 반발은 제압됐다.
덩샤오핑은 1992년 5월 공장 시찰 중 "나는 경제를 모르지만 듣고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는 간부를 뽑을 때 경제를 이해하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주룽지가 바로 경제를 이해하는 사람이다"라며 주룽지를 전폭 지원했고, 그해 10월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불과하던 64세의 주룽지는 몇 계단을 뛰어넘어 단숨에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서열 5위)에 진입한다.
그는 이후 부총리(1991∼1998년) 겸 중국인민은행장(1993∼1995년), 총리(1998∼2003년) 등을 거치며 중국 경제 개혁의 책임자 역할을 도맡게 된다.
손이 닿지 않은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구석구석 개혁을 주도한 그를 두고 해외에서는 '경제 차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국유기업 개혁이다.
인력 과잉과 생산 저효율, 자원 낭비, 부채 누적 등으로 만성 적자 상태였던 국유기업 전반에 칼을 들이댔고,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抓大放小)는 기조 아래 핵심 기업 중심의 재편을 단행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소형 국유기업들은 합병되거나 해외에 매각됐고, 생존 능력이 없는 기업은 파산·퇴출 조치됐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 명의 국유기업 노동자가 '철밥통' 일자리를 잃었는데, 사회보장 및 재취업 지원 시스템이 마땅히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노동자를 내팽개쳤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과감한 개혁 스타일은 이처럼 '명과 암'을 모두 수반하기도 했다. 중앙정부로 재정을 집중시키며 개혁의 동력을 확보했으나 지방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농민 부담 증대, 부동산 거품을 유발했다는 평가를 받은 1994년 분세제(分稅制)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시기 신속한 대응과 중국이 세계 무대로 도약할 수 있게 한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중앙정부 개혁, 반부패 드라이브 등은 지금까지도 그의 업적으로 기억된다.
중국 당정은 이날 2천700여자 길이의 공식 부고에서 업적을 상세히 소개한 뒤 "주룽지 동지는 인민 대중에 깊은 정을 갖고 있었다. 정부공작인원(공무원)은 스스로가 인민의 공복임을 명심해야 하고, 감히 진실을 말하며, 미움받기를 두려워 말고, 특수화(특권화)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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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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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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