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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럴 알렉시스 존슨 전 대사] 독립 비관하던 미 외교관, 광복의 지체 막았다

Los Angeles

2026.08.1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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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누비며 현장 이해
하지 점령 계획에 강력히 반발
맥아더에 막히자 국무부로 우회
결국 트루먼 한국성명 끌어내
훗날 '극동 전문가'로 주일대사
베트남전쟁 당시 알렉시스 존슨(왼쪽에서 네 번째)이 에어포스원에서 린든 B. 존슨(맨 오른쪽) 대통령 주재로 열린 참모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알렉시스 존슨(왼쪽에서 네 번째)이 에어포스원에서 린든 B. 존슨(맨 오른쪽) 대통령 주재로 열린 참모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존슨(왼쪽)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설치된 한반도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고 있다. [자서전 발췌]

존슨(왼쪽)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설치된 한반도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고 있다. [자서전 발췌]

1930년대 한국의 독립을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미국 외교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45년 8월 패망 후에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제 통치 세력을 조속히 걷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고, 실제 미국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유럴 알렉시스 존슨(1908~97) 이야기다. 1966년 7월 26일자 뉴욕타임스는 존슨의 주일대사 부임을 전하면서 그를 ‘극동 전문가’로 소개했다.
 
1935년 국무부에 들어간 존슨은 일본을 거쳐 2년 뒤 서울의 미국영사관에 부영사로 부임했다.
 
서울은 그가 외교관이라는 직업에서 처음으로 만족감을 느낀 곳이기도 했다. 존슨은 1984년 출간한 자서전 '권력의 곁에서(The Right Hand of Power·표지)'에서 일본어에 능통한 자신이 한국에 거주하던 미국인들과 일본 당국 사이의 소통을 중재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일제하의 조선이 “한심할 정도로 부패하고 허약해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를 토대로 존슨은 “한국이 독립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너무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였다”고 판단했다.
 
일제 식민통치의 잔혹함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단발령, 일본어 교육, 황국주의 사상 주입 등 일제의 억압을 회고록에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인지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또 당시 대만에 주둔한 일본 해군과 비교해 한국에 배치된 일본 육군.경찰이 한국인들을 훨씬 가혹하게 다뤘다는 인상도 남겼다.
 
그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1938년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과 만포진, 운산을 거쳐 북부 지역을 여행했다. 당시 익힌 한반도 지리와 날씨는 나중에 한국전쟁 전후 지원 업무에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렇게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존슨이 다시 한반도 문제의 중심에 등장한 것은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 8월 16일이었다. 필리핀 마닐라 영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참모장인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은 한국 근무 경험자인 존슨에게 연락해 한국 진주를 앞둔 미 24군단장 존 하지 중장을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를 만난 뒤 존슨은 “하지뿐 아니라 그의 참모진도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하지의 한국 점령 계획에 대해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와 기존 일본인 관리들을 상당 부분 활용해 남한을 통치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기존 행정조직을 활용하는 점령 방식을 한국에도 비슷하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존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구술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제의 경찰국가 체제가 민중을 통제하고 있다며 한국인에게 숨도 못 쉬는 억압상태를 계속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봤다. 자서전에서도 “그곳의 관리들이란 증오받는 일본인 점령자들과 그 앞잡이들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워싱턴에서는 아무도 한국을 일본과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하지에게 내려진 한국 관련 명령은 일본에 대한 명령과 동일했다”고 정책의 허점을 짚었다.  
 
존슨은 하지와 함께 서덜랜드와 맥아더에게 한국에는 일본과 다른 별도의 군정 방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존슨은 “맥아더가 기존 계획을 워싱턴에 다시 올려 수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했다.
 
존슨은 결국 이 사안을 자신의 상관이던 폴 슈타인토르프 마닐라 총영사에게 건의해 슈타인토르프 명의로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 이를 수신한 딘 애치슨 국무부 부장관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해, 결국 대통령 성명을 이끌어냈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일본인 관리가 한반도에 남아 있던 배경에 대해 유례없이 대통령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자칫 더 길어질 수도 있었던 ‘광복의 지체’는 이로써 장기화를 피하게 됐던 것이다.
 
존슨은 그해 9월 22일 6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군정 수립에 들어간 하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존슨은 하지의 참모를 자신의 숙소에 지내게 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교류했다.  
 
그는 하지를 "성실하고 유능한 군인이었으며 일반적으로 평가받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행정가"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에게 처음 내려진 명령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래서 출발부터 좋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일제가 물러나고 한국의 해방을 지켜본 존슨은 “매우 가슴이 벅찼다”고 썼다.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 자신의 초기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이를 외교관으로서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존슨과 한국과의 인연은 더 오래 전 이미 시작돼 있었다. 그가 결혼식을 올렸던 워싱턴DC의 파운드리 연합감리교회에는 한 한국인 남성이 꾸준하게 출석해 한국의 독립을 이야기했다. 당시 존슨은 그를 ‘가망 없는 이상주의자(hopeless idealist)’ 쯤으로 여기며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고 했다. 그 남자는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었다.  

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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