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업회 창립 광고 내자 "목발로 다 때려부순다" 협박도 "그래도 내가 덕을 본 사람인데 어떻게 배은망덕할 수 있나"
한국이 침략 당하면 미국이 돕고, 미국이 침략 당하면 한국이 돕는다…이승만, 배짱으로 동맹 맺어
"아들이 아버지·스승에게 '동무'라 부르는 이게 커뮤니즘의 커먼(Commom)…안 망하는 게 이상하지"
미주 언론계와 한인사회에서 '야사(野史)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통하는 윤세웅(85) 박사. 23세에 의사가 되어 서울 경찰병원에 근무하던 시절 윤치영 서울시장의 찢어진 이마를 꿰매다 김종필을 내쫓았던 청년 의사는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최초로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주역이 됐다. 85세의 나이에도 서슬 푸른 기억력으로 현대사의 격동을 풀어내는 윤 박사를 베이사이드에서 만났다.
윤박사는 독실한 기독교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돼 뉴욕 제일교회를 창립했으며 또한 미주기독교방송국(KCBN)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KCBN 방송국에서 진행됐다. [사진 KCBN]
미주기독교 방송국(KCBN) 인터뷰실, 여든다섯의 나이가 무색하게 청청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윤세웅 박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태생이다. 6·25 전쟁과 4·19 혁명, 5·16 군사정변을 몸으로 통과한 인물이다.
그는 세계 어디에도 없던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를 20여 년 전 뉴욕 산수갑산 식당 옆 자그마한 홀에서 40~50명을 모아놓고 최초로 창립한 초대 회장이다.
협박 전화와 신변의 위협 속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에게 '왜 하필 이승만이었는가'를 물었다.
"나는 원래 정치가 싫어서 미국으로 나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서 개업하고 있을 때, LA에서 '여(呂) 장로'라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3년 동안 찾아와서 나를 달달 볶았어요.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을 꼭 시작해보십시오' 하면서. 3년을 와서 저러니 내가 어쩔 수가 없더라고. 그때만 해도 한국이나 미국이나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이 아주 안 좋았어요. 부정선거니 뭐니 해서 다들 피할 때였으니까."
―주변 반발이 어느 정도였나요.
"말도 못 했어요! 일간지에 창립 모임을 갖는다고 광고를 냈더니 전화가 빗발치듯이 걸려와. '내가 4·19 때 다리가 부러져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데, 찾아가서 다 때려부수겠다'고 협박을 해대요. 엄청나게 힘들었지. 그래도 내 마음속엔 명확한 게 하나 있었어. 과(過)도 있고 공(功)도 있지만,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일제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 내가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인데 배은망덕할 수는 없잖아."
"64년도 한국서 바지 한 벌 값이 쌀 한 가마니였어. 그런데 미국 와서 인턴하니까 월급을 1만600불을 줘. 한국의 1000배야! 내가 대한민국(ROK)이라는 나라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인데 배은망덕할 수 있나."
―'덕을 보았다'는 말씀 뜻은.
"우리가 일제시대 때 그대로 살았어 봐요. 내 이름이 윤세웅이 아니라 '송평세웅(松平世雄)'이 될 뻔했어. 선거권도 없고 피선거권도 없이 억압받고 살던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게 8·15고, 대한민국(ROK)이라는 정통성 있는 나라를 세운 게 이승만이에요. 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공보관을 통해 미국 의사협회가 주관하는 자격시험(ECFMG)을 볼 수 있었던 거요."
윤 박사의 기억은 1960년대 서울 한복판으로 내달렸다. 1964년,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치영 씨가 워커힐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 유리문에 이마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을 마다하고 권력층은 갓 전문의 수련을 받던 청년 윤세웅을 긴급 호출했다.
―당시 윤치영 씨 치료 때 김종필 씨를 호통쳐 내쫓으셨다는데.
"워커힐에서 술을 드시고 나가다가 메인 도어 문지방에 부딪혀 이마가 이만큼 찢어졌어. 갔더니 응급실이 난리야. 소독을 하고 소독포를 딱 씌워놓고 실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소독포를 젖혀보고 "아이구 시장님, 많이 다치셨네요" 하면서 손을 대려고 그래. 보니까 김종필이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 '지금 치료해야 하니까 당신들 다 나가시오!' 하고. 그때 김종필이를 처음 만났지.
―당시 명의들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레지던트였던 윤 박사님을 불러갔을까요.
"나도 그게 지금도 의문이야. 정보라는 게 무서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일하던 경찰병원 3층 방에 내무부 치안국 직통 경비전화가 놓여 있었어요. 수화기만 들면 제주도까지 바로 연결되는 전용선인데 그 방이 원래 이승만 정권 시절 3·15 부정선거 지령실로 쓰이던 방이었대."
윤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공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그가 가진 외교적 선견지명과 배짱에 대해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에 대해 평소 높게 평가해 오셨지요.
"생각해보세요. 이승만같이 배짱 좋은 사람이 없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한국이 침략당하면 미국이 돕고, 미국이 멕시코나 소련한테 침략당하면 한국이 도우러 간다'고 맺었어. 당시 한국이 무슨 힘이 있다고 미국을 도우러 가? 말이 안 되는 계약인데 그걸 트루먼하고 맺어버렸잖아."
―6·25 당시 미국 참전 과정에 대한 비화도 언급하셨는데요.
"전쟁이 터지니까 한국에서 미국 워싱턴DC로 전화를 걸었어. 그때는 셀폰이 없으니까 일본, 하와이, LA 교환을 서너 번 거쳐야 연결돼요. 미국은 한밤중 새벽 2시야. 트루먼 대통령이 새벽에 비상벨이 울리니까 짜증을 내며 받았을 거 아니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이봐 해리! 나 이승만이야!" 하니까 트루먼이 놀란 거지. 얼마나 친했으면 대번에 미국 대통령 이름을 부르며 '우리 전쟁 났다, 군대 보내달라' 했겠어. 그래서 미군이 72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한 거요."
―박사님께서는 의사이자 목사로서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로 '크리스천 데모크라시(Christian Democracy)'를 강조하십니다.
"이승만 박사가 38년 동안 미국에서 배워서 한국에 이식하려 했던 핵심이 바로 크리스천 데모크라시예요. 이건 단순히 교회 다니라는 말이 아니오. 조물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인정하고, 사회의 상하 질서와 기틀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말하는 겁니다. 공산주의(Communism)라는 말의 어원이 '커먼(Common)' 아니오. 너나 나나 똑같다는 거요. 아들이 아버지한테 '동무'라 부르고, 스승한테 '동무'라 부르는 게 정상인가? 창조주의 질서와 직분의 가치를 무시하고 가짜 평등을 외치다가 망한 게 칼 마르크스주의고 소련 체제요."
―오늘날 한국 사회와 정치 현실을 보시면서 느끼는 소회는.
"한국이 몇천 년 역사를 갖고도 왜 핍박받고 살았겠소. 미국은 200년 남짓한 역사로 세계 최강국이 됐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고, 국가의 뿌리와 정통성을 무시하면 아무리 잘살아도 한순간에 흔들리는 법이오. 정권이 바뀌고 제2·제3·제4공화국이 들어서도 대한민국의 뿌리는 살려둬야 할 것 아니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세우고 자유민주주의 기틀을 다졌어. 과오만 끄집어내 건국 대통령을 매장하고 지폐에서 초상화까지 싹 없애버리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
"역사의 뿌리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는 과대로 보되, 배은망덕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내가 명예를 더 얻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제 살아있는 산 증인으로서 죽기 전에 할 말을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