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중시한 1세와 달리 2세는 주류사회로 뻗어나가 공동체, 필수 아닌 선택으로 차세대를 향한 전환 위해선 개인 넘어 시스템을 세울 때
홍명기(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이사장은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총회장과 동상 건립위원장을 맡아 사재 15만 달러를 출연하는 등 약 60만 달러의 건립 기금을 마련했다. 2001년 열린 도산 안창호 동상 제막식. [중앙포토]
때로는 떠난 빈자리가 그 사람의 크기를 보여준다. 타계한지 올해 5주기(18일)를 맞이한 홍명기(사진) M&L 홍 재단 이사장이 그렇다. 고인은 한인사회의 고비마다 사람과 돈을 모으고 방향을 제시했던 ‘큰 어른’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을 리더십의 승계는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18일 그의 타계 5주년을 맞아 한인사회에서 ‘어른 리더십’의 단절과 약해지는 구심점 등을 세 차례에 걸쳐 진단한다.
홍 이사장이 한인사회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계기는 1992년 LA폭동이었다. 한인 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도 정치·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목격한 그는 정치력 신장을 한인사회의 핵심 과제로 봤다.
한인들의 투표 참여와 공직 진출을 독려했고, 당적을 가리지 않고 한인 정치인을 후원했다.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미셸 스틸, 하원의원 영 김, 어바인 시장을 거쳐 이번에 시의원 선거에 나선 강석희, 최초의 LA 시의원이 된 데이비드 류…
2001년 사재 1000만 달러로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했다. 남가주한국학원과 대한인국민회관, 도산 안창호 동상 건립 등 교육·권익·이민사 보존에 정성을 기울였다.알려진 기부액만 2000만 달러가 넘는다.그의 역할은 기부의 금액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현안이 생기면 사람을 불러 모았고, 돈이 모자라면 먼저 지갑을 열었다. 단체가 흔들리면 직접 책임을 맡아 이끌었다. 자신의 재산과 인맥, 사회적 지위를 공동체의 자산처럼 사용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그가 떠나면서 한인사회에서는 “이제 큰 어른이 없다”는 탄식이 나온다. 이를 단순한 인물난으로만 봐서는 지금 한인사회가 겪는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원로급 리더 몇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런 어른을 만들어냈던 이민사회의 조건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창근 KAF 전 이사장은 “원로 한두 명이 이끄는 시대는 끝났다”며 “1세는 재정과 경험으로 뒷받침하고 운영과 결정은 차세대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 한인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생활권이자 경제권이었다. 대개 한인 업소에서 일했고, 한인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한인 변호사와 회계사를 찾고, 한인 교회와 단체에서 사람을 만났다. 먼저 성공한 사람은 후배 이민자를 끌어주고 한인사회에 기부했다. 주류 노동시장 진입이 어려웠던 1세에게 한인타운과 그 네트워크는 생존의 울타리이자 계층 상승의 사다리였다. 홍 이사장의 공동체 의식도 그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 한인사회는 단순히 혈통을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사업과 직업, 인간관계가 얽혀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공동체가 어려워지면 자신의 삶도 영향을 받았다.
이 구조에는 역설이 있다. 이민사회는 성공할수록 그 이민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2세들은 작은 섬(한인사회)을 떠나 육지(주류사회)로 향하는 법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성장한 2세는 영어가 모국어이고 미국 대학을 나와 기업과 법조·의료·학계 등 주류사회로 곧바로 진출한다. 부모 세대처럼 일자리와 금융, 인맥을 한인사회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 생활권도 한인타운을 벗어난 지 오래다.
1세에게 한인사회는 생존을 위한 필수 공동체였다. 2세에게는 여러 정체성과 네트워크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 정도다. 2세가 한인사회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민 1세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차세대의 낮은 참여를 ‘뿌리의식 부족’이나 ‘무관심’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 1세는 자녀들에게 더 넓은 미국 사회로 나아가라고 가르쳤고, 자녀들은 실제로 그렇게 성장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1세가 이룩한 공동체의 자산과 경험, 네트워크를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사람이 떠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공동체가 움직일 장치를 만들어놓았느냐는 질문이다. 홍 이사장 별세 뒤 그가 앞장섰던 공익사업이 동력을 잃거나 표류하고 있는 현실은 이 질문을 더욱 무겁게 한다.
홍명기 같은 ‘큰 어른’을 다시 찾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만들어냈던 이민사회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안 LA한인회 회장은 “세대교체는 단절이 아닌 자연스러운 바통 터치가 돼야 한다”고 했다.
큰 어른이 사라진 자리를 또 다른 큰 어른이 채워야 하는가. 아니면 이제 사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 한인사회가 맞은 세대 전환의 진짜 질문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