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영진이 퇴직연금을 인사부서가 관리하는 복지 항목이자 법정 금액만 매년 납입하면 끝나는 ‘비용’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금리 변동성이 커지고 물가가 오르며 인재 확보 경쟁까지 치열해지면서 이런 인식은 재무와 조직 양쪽의 위험을 키우기 십상이다.
퇴직연금은 이제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재무 리스크로 다뤄야 한다. 확정급여형(DB형)은 퇴직 시점의 임금 수준에 따라 퇴직금이 정해지므로 임금 상승률이 적립 자산의 운용수익률을 웃돌면 그 차이만큼을 회사가 메워야 한다. 그런데도 국내 다수 기업은 DB형 적립금을 원리금 보장 상품에만 넣어둔 채 방치한다. 그 결과 금리와 임금 상승률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퇴직급여 부채(PBO), 당기손익, 재무건전성이 함께 출렁인다.
반면에 글로벌 기업들은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재무제표 차원에서 관리해 왔다. 영국 BT그룹과 BP는 금리와 물가 변동에 따른 미래 퇴직금 증가액을 미리 계산해 자산 운용에 반영하는 부채연계투자(LDI) 방식의 자산배분정책(IPS)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GM과 IBM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금 부채가 재무제표를 흔드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을 택했다. 연금 부채 관리를 최고경영진이 직접 챙겨야 하는 이유다.
확정기여형(DC형)을 도입한 기업도 안심할 수 없다. DC형에서 위험은 인재 유지와 ESG 경영이라는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운용 책임이 근로자 개인에게 있다는 이유로 회사가 손을 놓으면 수익률 저하에 따른 노후 불안이 핵심 인재의 이탈로 번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의 401(k) 운영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 이들 기업은 직원의 적립액에 맞춰 회사도 일정 비율을 함께 넣어주는 ‘매칭’ 제도를 운용한다. 입사와 동시에 자동 가입하고 연봉 상승에 따라 적립률도 높아지는 방식이다. 퇴직연금 관리를 인재 확보 전략이자 ESG 경영의 실천 과제로 삼는 셈이다.
결국 퇴직연금 관리의 효율성은 기업가치 평가와 직결된다. 선진 사례처럼 퇴직 부채를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고 자산 운용 효율을 높이면 재무 건전성이 개선되고, 자본조달비용(WACC)도 낮아진다.
반대로 방치된 퇴직연금은 기업가치를 갉아먹는 요인이 된다. 퇴직연금은 더는 인사부서 서류함에 넣어둘 주제가 아니다. 우리 기업도 CEO와 CFO가 직접 나서 전문적인 자산배분정책을 세우고 연금자산운용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힘을 실어야 한다. 퇴직연금을 바라보는 경영진의 인식 전환이야말로 재무 안정성과 인재 경쟁력을 함께 확보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