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강남 한복판서 15번 찔렸다…‘300억 수출’ 앞둔 벤처 대표의 비극

중앙일보

2026.08.17 13:00 2026.08.17 23:02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2000년 전후 유망 기업이 많이 입주한 강남 테헤란로의 야경. 중앙포토

2000년 전후 유망 기업이 많이 입주한 강남 테헤란로의 야경. 중앙포토

#새천년의 밤

2001년 2월 8일 오전 1시35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어둠 속에서 서늘한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 너 이리 와. "

돌아볼 틈도 없었다. 이내 차가운 금속이 몸속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구석구석에서 겨울의 찬 공기와 대비되는 뜨뜻한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슴, 옆구리 그리고 허벅지. 부위를 가리지 않았다.

섬뜩하게 빛을 반사시키는 25㎝ 길이 회칼이 온몸에 박혔다. 뽑혀지면 곧장 다시, 또 한 번 뽑혀졌다 다시 한번. 세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반복된 뒤에야 움직임이 그쳤다. 총 열다섯 번.

온몸으로 칼을 받아들인 남자는 비틀거리며 생애 마지막 몇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도착한 대로변은 딴 세상이었다. 왕복 8차로의 테헤란로. 밤새 꺼지지 않는 24층짜리 르네상스호텔의 네온.

새천년의 강남은 그런 곳이었다. 대로는 밤에도 대낮처럼 밝지만, 모퉁이 하나만 꺾으면 빛이 뚝 끊어지는 암흑. 남자는 비명을 토해 내려 했지만, 소리는 채 입 밖을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잦아들었다.

등 뒤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희망마저 다 몸 밖으로 빠져나간 듯, 남자의 몸이 풀썩 꺾였다. 그리고 다신 움직이지 않았다. 입김마저 얼어붙는 새벽. 뒤이은 발소리들도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남자의 이름은 김현필. 축산폐수를 24시간 안에 맑은 물로 바꾸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환경 벤처기업, ㈜코에프의 대표이사였다. 회사에 들어온 투자금만 25억원. 수십억을 굴리던 사업가를 칼로 찌른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강남에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럿이.

#없어진 것이 없다
강남경찰서 CCTV 범죄 현장 모니터링. 기사와 직접적 연관은 없음. 김춘식 기자

강남경찰서 CCTV 범죄 현장 모니터링. 기사와 직접적 연관은 없음. 김춘식 기자


없어진 것이 없었다. 열다섯 번을 찌르고 피해자를 무력화시켰지만, 지갑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목적이 물건이 아닌 사건, 즉 강도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사람이다.

#1만 건의 통화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갈등과 원한이었다. 수사팀은 김현필과 얽힌 회사 관계자들의 통화 기록을 전부 확인하기 시작했다. 김 형사에게 배당된 사람 중에는 회사 영업차장 유태진(37)이 있었다.

유태진은 술자리와 거래처 응대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회사 영업을 책임지던 인물이었다. 용의자로 의심하기엔, 회사에 아주 절실한 사람이었다. 회사가 잘돼야 살 사람. 흔들리면 자신도 흔들리는 사람.

김 형사는 차근차근 수사를 이어가기 위해 유 차장의 통화 내역 6개월치를 뽑았다. 총 1만 건이 넘었다. 상대를 하나하나 확인했지만, 매번 특별할 것 없는 거래처였다. 의심할 발신자도, 수신자도 없었다.

공중전화가 본격화된 이래, 2000년 전후로 전국적으로 56만 대가 넘는 등 사용량이 많았다. 중앙포토

공중전화가 본격화된 이래, 2000년 전후로 전국적으로 56만 대가 넘는 등 사용량이 많았다. 중앙포토


김 형사도 미심쩍은 상태로 자료를 덮으려다, 다시 멈췄다.

‘이상하네. 없잖아.’


단서가 없는 게 아니었다. ‘없음’이 단서였다.

(계속)

“무슨 마지막 기회를 받은 사람처럼 절박했어요.”

유태진에 대한 회사 사람들의 평은 일관됐다. 그런 유태진의 일상은 사건 두 달 전부터 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투자금 25억원을 받은 벤처회사 대표는 왜 강남 한복판에서 회칼에 열다섯 번 찔린 채 발견됐을까.

형사가 1만 건의 통화에서 찾아낸 두 사람의 뜻밖의 연결고리는 아래 링크를 통해 알 수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50378

한찬우([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