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기 5주기, 그 빈자리(중) 인물 의존형 리더십엔 한계 시스템 없으면 사업도 멈춰 차세대에 실질적 권한 줘야 그리스계 세대승계 참고를
한인사회가 1세 중심 리더십에서 벗어나 차세대의 참여와 역할을 확대하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난 3월 LA한인회와 헤더 허트 LA시의원 등이 올림픽 조달사업 참여를 위한 소상공인 워크숍 개최 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김상진 기자
고 홍명기 이사장의 헌신은 컸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타계는 한인사회의 약점도 드러냈다. 그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빈틈이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모으고, 돈이 필요하면 기부하고, 조직이 흔들리면 직접 책임을 맡는 지도자가 있었다. 인물이 시스템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셈이다.
사람은 영원할 수 없다. 기업은 최고경영자가 바뀌어도 돌아가고, 대학은 총장이 떠나도 학생을 가르친다.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특정인의 재력과 인맥, 헌신이 있어야 움직인다면, 시스템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LA 한인사회에는 권익·복지·교육·문화·경제 분야의 수많은 단체가 있다. 상당수가 1세 중심으로 구성돼 회장이나 이사장의 역량에 의존해왔다. 지도자가 물러나면 활동이 위축되거나 내부 갈등이 불거진 사례가 적잖다.
다른 이민사회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그리스계 이민자들은 차별에 맞서 1922년 그리스계 미국인 교육진흥협회(AHEPA)를 만들었다. 교육과 장학, 자선, 시민 참여를 조직의 기능으로 만들고 여성·청년 조직까지 두면서 세대가 바뀌어도 참여할 통로를 마련했다. 그리스계는 이런 조직 기반을 다지면서 주류 정치에 빠르게 진출했다. 1969년 부통령이 된 스피로 애그뉴,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거쳐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마이클 두카키스는 둘 다 이민 2세인데다 AHEPA에서 활동했다.
물론 한인사회도 정치적 성취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연방의회와 주의회, 지방정부에 진출한 한인 정치인이 늘면서 1992년 LA폭동 당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그러나 한국계 정치인의 성공과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이 반드시 동의어는 아니다. 개별 정치인이 미국 정치에서 성공하는 것은 한국계 미국인의 성취다. 반면 인재를 발굴하고 유권자와 정치자금을 조직하며 주요 현안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공동체의 조직된 정치력이다.
전자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후자는 여전히 몇몇 인물과 단체의 역량에 좌우되고 있다. 홍 이사장이 강조했던 정치력 신장도 이제 ‘한인 정치인을 만드는 단계’에서 ‘정치력을 축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다.
변화의 조짐은 있다. 홍 이사장 등이 2018년 설립한 미주한인재단(KAF)은 10만 달러 이상을 기부·약정한 파운더스 서클 회원 71명을 확보했고, 2020년 이후 55개 비영리단체에 330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개인의 기부를 공동체의 지속적인 자산으로 남기자는 취지다.
송정호 KYCC 관장 등이 지난 6월 진행한 나무 심기 행사. [KYCC 제공]
LA한인회도 로버트 안 회장과 스티브 강 이사장 등 영어권 인사와 젊은 이사진을 중심으로 세대 교체를 시도하고 있다. 1.5세가 주도해 출범한 KYCC는 직원과 사업, 재원을 다변화하며 전문 비영리기관으로 성장했다. 송정호 KYCC 관장은 “1세대 리더십은 젊은 세대와 비영리기관으로 옮겨가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며 “방식은 달라졌지만 더 나은 한인타운을 만들려는 유산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클라라 원 대한인국민회 전 이사장은 1·2세를 연결할 중간 세대의 부재를 아쉬워한다. 그는“40~50대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야 하지만 생업과 가정에 매여 나서기 쉽지 않다”며 “1세대가 이들의 참여를 끌어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세대를 행사에 초청하고 봉사를 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을 기대하려면 권한도 넘기는 게 순리다. 강창근 KAF 전 이사장은 “성공한 2세들이 기부와 봉사, 멘토링과 정치 참여를 통해 집단적 구심점을 만들도록 권한까지 넘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준 피코유니온 주민의회 의장도 “2세를 책임 있는 직책에 영입해 지역사회 참여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2세에게 필요한 것은 1세 단체의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이 아니라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자신의 전문성과 주류사회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자리다. “왜 2세가 한인사회에 오지 않느냐”고 묻기에 앞서 “2세가 왜 와야 하는가”에 답하는 게 생산적이다. 1세의 재정과 경험, 1.5세의 연결 능력, 2·3세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하나의 구조 안에 묶는 게 세대교체의 핵심이다.
홍 이사장이 떠난 지 5년. 이제 한인사회가 던질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제2의 홍명기는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다. 홍명기가 없어도 한인사회는 움직일 수 있는가.
그 답은 이미 한인타운 곳곳에서 시험대에 올라 있다. 그가 생전에 정성을 기울였던 사업 가운데엔 동력을 잃은 사례도 있다.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시작할 때는 거창했지만 책임질 주체가 불분명해지면서 표류한 경우다. 사람이 떠난 자리를 시스템이 메우지 못하면 남는 것은 미완의 사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