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개막하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종합격투기 국가대표 이보미, 윤태영, 최은석(왼쪽부터). 이번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자부 4개, 여자부 2개의 금메달이 걸려있다. 강정현 기자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체육관, 검은색 철창으로 둘러싸인 8각 옥타곤. 매서운 눈매의 윤태영(30·남자 77㎏급·트래디셔널)이 왼손으로 페이크를 두 차례 준 뒤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주먹이 안면에 꽂히기 직전, 최은석(20·남자 71㎏급·모던)은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몸을 비스듬히 틀어 왼어깨로 펀치를 흘려냈다. 링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보미(27·여자 54㎏급·모던)의 눈에도 이글거리는 열기가 어렸다. 마치 자신이 링 위에 선 듯, 그는 속사포 같은 섀도복싱으로 몸을 풀었다.
이들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MMA(종합격투기) 국가대표들이다. 아시안게임 MMA는 두 종목으로 나뉜다. 래시가드에 트렁크를 입고 싸우는 모던(남자 60·71㎏급, 여자 54㎏급 3개 체급)과 전통 도복을 착용하는 트래디셔널(남자 65·77㎏급, 여자 60㎏급 3개 체급)로 6개의 금메달이 걸렸다. 철창 옥타곤 대신 8각 매트에서 3분 2라운드(결승전 5분 2라운드)로 치러진다.
한국은 로드FC 웰터급(77㎏급) 현역 챔피언 윤태영, 고교생 때 프로에 데뷔한 ‘천재 파이터’ 최은석, 여자부 베테랑 이보미 등 3명이 도전장을 냈다. 모두 메달을 노린다. 로드FC 챔피언 출신 권아솔 수석코치가 훈련을 이끈다. 올해 아시아선수권대회 준우승자이자 대표팀 막내인 최은석은 “메이저 종합대회에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다고 생각하니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벅차오른다”며 “격투기 하길 참 잘한 것 같다. 합숙 2개월 차에 접어들며 (윤)태영이 형, (이)보미 누나와는 남매처럼 지낸다”며 웃었다.
21일 오후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부산' 메인카드 페더급 경기에서 정찬성이 프랭키 에드가에게 TKO로 승리 후 환호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미국 UFC의 최정상급 스타는 수백억 원의 파이트머니를 받지만 한국 격투계 현실은 딴판이다. 한 경기 대전료가 수백만 원 수준이다. 1년에 서너 경기 뿐인데다 스폰서를 구하기도 어려워 대부분 투잡을 뛰며 훈련비를 충당한다.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면 대전료가 크게 오르지만, 꾸준히 경기를 해야 수입을 유지할 수 있다.
국가대표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생 종목인 데다 상위 단체인 대한MMA총협회가 대한체육회 준회원이라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입촌이 불가능하다. 대표팀은 훈련 시설을 찾아 서울, 경기 광주, 강원 원주 등을 오가며 ‘메뚜기 합숙’을 이어가고 있다. 숙소는 고시원이다. 훈련 수당도 없다. 몇몇 스폰서가 십시일반으로 보탠 훈련비와 치료비로 버틴다.
체중 감량 때문인지 선수들 볼이 홀쭉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서로 의지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보미는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돈이 든다. 도와주는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문다”고 했다. 윤태영은 “선수촌 같은 환경에서 훈련하지 못해 생긴 유일한 무기는 ‘헝그리 정신’”이라며 “내가 좋은 성적을 내야 격투기가 마이너 종목의 설움을 벗을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난과 부상의 위협 속에서도 케이지에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이 거친 스포츠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 선수 모두 중·고교 시절부터 청춘의 전부를 체육관 매트 위에서 보냈다. 눈물과 땀과 피로 얼룩진 일상을 남들은 고행이라 부를지 몰라도, 온몸을 던져 싸우는 그 순간 그들은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훈련 중 정찬성(왼쪽)과 기념 사진 찍은 이보미. 사진 이보미
정찬성(왼쪽)과 스파링하는 최은석. 사진 정찬성 유튜브
열악한 환경 속 대표팀의 든든한 지원군은 UFC 페더급 3위까지 올랐던 ‘코리안 좀비’ 정찬성이다. 2023년 은퇴 후 체육관을 운영 중인 정찬성은 후배들을 위해 기술과 실전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최은석은 “우상에게 직접 배우고 스파링하니 실력이 쑥쑥 는다. 정찬성의 제자답게 아시안게임에서 ‘K-좀비’의 매운맛을 보여주겠다”고 별렀다.
윤태영은 “레전드의 지도를 받았는데 출전에 만족할 순 없다. 사상 첫 아시안게임 격투기 금메달리스트가 되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보미는 “격투기에선 우승해도 애국가를 들을 수 없다. 아시안게임 시상대 맨 위에 올라 애국가를 듣는다면 울컥할 것”이라며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
정찬성은 “부족한 점은 함께 메울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발전할 수 있게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한편, 정문홍 로드FC 회장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3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