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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화참견] 하영은 왜 방송에서 집안 자랑을 했나

중앙일보

2026.08.19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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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입’이 문제였다. 전도유망해 보이던 여배우의 커리어가 치명상을 입었다. 배우 하영 얘기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런 엿같은 사랑’ 홍보차 KBS 예능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일제때 증조부부터 4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자랑한 것이 결국 ‘친일파 가족’이라는 흑역사를 고백한 꼴이 됐다. 친일파 청산이 잘 안 되어 ‘독립유공자 후손은 고생하고,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며 산다’는 우리 사회 뿌리 깊은 반감을 건드렸다.

의사 집안 발언 후폭풍 거세
스펙 화려한 블핑 성공 이후
노골적인 금수저 마케팅 늘어
기획사와 배우 제 발등 찍었나

최근 친일파 집안 자랑으로 논란이 된 배우 하영. [뉴스1]

최근 친일파 집안 자랑으로 논란이 된 배우 하영. [뉴스1]

방송 직후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단체 활동이나 고종 독살설 연루 등 광범위한 친일 의혹이 제기됐다. 논란이 커지자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의 친일 행적은 역사적 사실”이라 확인했다. 불똥은 조부의 소록도 근무 이력, 부친의 과거 발언 논란 등 다른 가족들로까지 튀었다. 여론은 날로 과열 양상이다. 과거 사극에 출연한 하영이 한복 사진을 SNS에 올리며 “생애 첫 한복 즐거웠던 촬영”이라고 쓴 내용에 대해, 성인이 돼서야 한복을 입어보다니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며 꼬투리 잡는 무리한 비판까지 나왔다. 파장은 드라마 ‘이런 엿같은 사랑’에 미쳤고, 차기작 SBS ‘승산 있습니다’도 고민에 빠졌다. 촬영이 막바지인데 과연 배우 리스크를 어떻게 털어낼지 미지수다.

소속사의 첫 대응은 “사실무근”이었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성급한 대응이 화를 키웠다. ‘친일 논란’의 폭발력을 가볍게 봤다. 하영이 자필 사과문을 통해 “그동안 가족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족사를 가볍게 언급했던 것을 반성한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앞으로 행동에 따라 평가 갈릴 것”
물론 일제시대 엘리트 집단이라면 무조건 친일·매국 낙인부터 찍고 보는 건 문제다. 그러나 그 시대 엘리트라면 구조적으로 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스스로 성찰하지 못한 쪽의 문제도 크다. 연좌제처럼 조상 잘못을 후손에게 다 물을 순 없지만, 조상 덕을 보려 했으니 잘못의 책임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백범의 증손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앞으로 하영의 행동에 따라 국민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하영은 왜 그렇게 방송에서 집안 자랑을 했을까.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중중외상센터’의 간호사 천장미 역으로 데뷔 6년 만에 처음 각광받은 하영은 당시 인터뷰에서 “증조부가 한양에서 첫 양방을 개업한 의사다. (의사 집안에 태어나) 너무 감사하다.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미국의 명문 미술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화제였다. 이번 ‘옥탑방의 문제아들’ 방송 직전 넷플릭스의 홍보 예능에서도 “4대째 의사 가문” 발언을 이어갔다. 지난해 KBS ‘신상출시 편스토랑’에서는 “본가에 냉장고가 5대다. (고기가) 맨날 썩는다”며 해맑게 경제적 여유를 과시했는데, 그 발언도 다시 회자됐다.

신인 배우가 예능프로나 인터뷰에 나와서 하는 말들이 돌발적일 수 없고 철저한 매니지먼트의 관리하에 이뤄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련의 발언들은 ‘금수저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의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연예계 특히 아이돌의 ‘금수저 마케팅’은 최근 수년간의 경향으로, 외모·스펙 다 훌륭하고 집안까지 좋은 ‘육각형’ 아이돌들이 각광받는 세태와 맞물려 있다. 이제 더이상 흙수저 BTS의 언더독 신화나 god가 연습생 시절 경기도 반지하 숙소에서 돈이 없어 상한 음식까지 먹으며 배를 곯았다는 자수성가형 일화가 잘 통하지 않는 옛날얘기가 된 느낌이다. 중소 기획사들까지 팀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숙소를 강남·청담에 얻어주는 시대다.

청담동 출신 해외파, 아니면 교포, 재력가 딸들로 구성된 블랙핑크의 성공이 결정적 변곡점이었다. 과거에도 명문가·명문대 출신 타이틀 덕을 보는 연예인들은 있었지만, 그게 팀의 성패를 가르는 본격적인 마케팅 요소가 된 것이다. 블랙핑크를 필두로 아이돌이 패션·뷰티·명품 등 글로벌 럭셔리 트렌드를 선도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여자 아이돌, 그것도 금수저 출신이 유리했다. 외모·스펙은 기본이고 기왕이면 좋은 집안에 부모의 직업을 따지고, 유복하게 자란 상류층 이미지가 매력이자 상품성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영 앤 리치’에 대한 사회적 선망도 이 시기 본격화됐다.

금수저·재벌 선망하는 사회 분위기
블랙핑크 프로듀서인 테디가 자기 기획사를 차려 선보인 걸그룹 미야오와 혼성그룹 올데이 프로젝트가 금수저 마케팅의 대표주자다. 압권은 올데이 프로젝트 멤버 애니. 신세계그룹 이명희 총괄회장의 외손녀이자 정유경 회장의 장녀인 ‘찐 금수저’다. 애니는 데뷔 전부터 ‘삼성가 손녀 연습생’으로 유명했고, 올데이 프로젝트가 데뷔와 동시에 음원차트·음악방송을 올킬하며 크게 성공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재벌에 대해서도 과거처럼 터부시하기보다 SNS 스타·셀럽으로 친근하게 호감을 갖고 선망하는 사회 분위기의 변화와 맞물린다.

그러나 아무리 금수저 마케팅을 하고, 자기 스펙을 언급하고 과시해도 4대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건 드문 일이다. 제 입으로 직접 집안 자랑은 삼가고 자연스레 금수저 아우라를 풍기다가, 암암리에 소문이 나면 인정하면서 겸손의 미덕까지 챙기는 게 대부분의 방식이었다. 이런 금수저 마케팅의 기본은 놓친 채 아이돌은 아니지만 ‘조상 대대로 찐 명문가 금수저’로 주목받으려는 과한 욕심이 제 발등을 찍은 게 아닌가 싶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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