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막내딸 가족이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사를 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주택과 교육 문제 등을 이유로 캘리포니아에서는 더는 미래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해 다른 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막상 내 가족이 떠나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스캐롤라이나라고 하니 문득 라코매점 Y사장님과 ‘수퍼땅콩’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K 프로 골프선수의 결초보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이다. 당시 나는 새벽 라디오 한방칼럼 생방송을 위해 매일 이른 시간 방송국에 갔다. 그 시간에도 어김없이 문을 열고 커피를 준비해 주던 곳이 라코매점이었다. Y사장님은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한 분이었다.
언젠가 역시 이른 새벽 생방송을 위해 매점에 들어섰다. 하얀 골프 모자에 전형적인 골프복 차림을 한 키 작은 젊은 여성이 아버지쯤 되어 보이는 남성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당시 골프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넸다.
“어, 학생! 골프를 좋아하나 봐요? 오늘 아버지하고 좋은 골프장으로 라운딩 가나 봐요?” 그 여성은 “아, 네~” 하며 웃고 가볍게 목례만 하고는 아버지를 따라 총총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Y사장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원장님도 참. 방금 저 여자분이 프로골퍼 수퍼땅콩 K프로잖아요. 옆에는 아버지고. 그 유명한 K프로를 몰라보셨네요.”
한국에서 Y사장님이 반포 아파트 현장소장으로 근무할 때 골조 하청업체를 운영하던 K프로의 아버지 K사장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때인가 K사장이 부도 위기에 처해 극한 상황까지 몰렸는데, Y사장님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K사장은 별거 중이라 다섯 살 된 어린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업무상 골프 약속은 잦았지만,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외동딸을 골프장에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아이는 캐디 언니들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어린아이가 골프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는 딸을 골프선수로 키웠다고 했다. 미국 LPGA 투어에 후원사 없이 진출했을 때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아버지와 Y사장님이 직접 차를 몰고 다니며 햄버거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헝그리 투어’ 생활을 함께했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팬데믹 2년 차인 2021년 봄이었다. 이른 새벽 방송을 마치고, 마침 로또 당첨자가 몇 주 동안 나오지 않아 당첨금이 9억 달러 가까이 올랐다는 소식에 나도 복권 한장 사볼까 싶어 라코매점에 들렀다. Y사장님께 20달러를 내밀며 로또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색하시며 말씀하셨다. “아, 원장님한테는 복권 안 팔아요.”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본 사모님이 옆에서 말했다. “여보, 아침부터 왜 그런 농담을 해요.” “아 글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장님한테는 안 판다고요. 의술이며 인품이며 이미 하늘의 복을 충분히 다 받으신 분이 왜 남의 복을 또 욕심내는지 모르겠어요. 안 팔아요, 안 판다고요.”
섭섭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큰 울림이 남았다. ‘저 말이 어쩌면 하늘이 내게 내리는 경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Y사장님이 우리 한의원에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라코매점을 정리하고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퍼땅콩 K프로가 골프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Y사장님을 위해 골프장이 많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소도시에 큰 카워시 사업체를 인수했고, Y사장님께 그 운영을 맡겼다는 것이다.
결초보은(結草報恩)은 받은 은혜를 깊이 새기고 잊지 않았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보답한다는 뜻이다. 지족자부(知足者富)는 족함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는 뜻이다. 수퍼땅콩 K프로는 Y사장님께 결초보은을 다했고, Y사장님은 나에게 지족자부의 울림을 남겨주셨다.
요즘처럼 로또 당첨금이 크게 올라 여기저기서 복권 이야기가 들릴 때면 그때의 일이 다시 생각난다. 어쩌면 진짜 큰 복은 더 많은 것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받은 복과 은혜를 알아차림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