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아가씨’는 긴 세월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유는 ‘왜색(倭色)가요’라는 것. 그 당시 왜색 딱지가 붙어 박해받은 노래는 부지기수다. 일본 흉내, 일본 냄새는 무조건 절대 안 된다는 갸륵한 애국심 또는 민족적 자존심 같은 것 때문이었다.
지난해 4월 초부터 5월 초까지 총 6회로 방영된 ‘한일가왕전’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는 일본 가수들이 나와서 일본말로 일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당당하게 안방극장을 누볐다. 한국 가수들도 유창한 일본어로 간드러지게 노래했다.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제작자 쪽의 설명은 이렇다. “한국 예능 및 가요 프로그램 최초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현역 가수들이 서로의 가창 실력으로 승부를 겨루게 됨과 동시에 한일 가수들 간의 친목과 우정을 도모하는 장을 마련하는 취지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 한국과 일본 간의 문화교류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유는 무조건 개방하면 저질 왜색문화가 밀려들어 오므로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 꽉 막혀 있다 보니, 오해도 많고 갈등도 커지기만 했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것은 1999년, ‘김대중-오부치 대중문화 개방’ 선언부터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조치였다. 우리의 경제, 문화 수준 모두 높아졌으니 일본문화를 겁낼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학술세미나, 문화예술 공연 등 한일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한류(韓流)의 시발점이 된 드라마 ‘겨울연가’가 2003년 일본의 국영방송 NHK를 통해 방영되어 일본 사회를 강타했다. 2002년에는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와 엄청난 응원 열풍이 있었다.
그리고, 짧은 사이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를 넘어서는 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앞서지는 못했더라도, 전처럼 뒤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즐거운 소식들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K-팝이나 드라마, 영화 같은 문화에서도 이미 일본을 넘어섰고, 하다못해 즉석 라면도 원조국인 일본을 추월하여, 세계 구석구석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일이다. 짧은 기간에 일본을 넘어선 K-컬쳐의 저력은 정말 대단한 문화현상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심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지만, 물밑에서 민간의 문화 교류가 꾸준히 이어져 온 덕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역할이 컸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 그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민족적 자신감과 심리적 당당함 같은 정신적 세계로 이어지는 일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일본을 당당히 이겼을 때 같은 통쾌함을 동반한다.
한일관계의 건전한 미래를 위해서는 폭넓은 문화의 교류가 대단히 중요하다. 두 나라의 국민이 서로를 알고, 마음이 통해야 이해도 하고 협력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되도록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부딪쳐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건전한 교류와 상호협력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사사건건 싸우고 대립하기만 하는 기성세대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다.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한일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69% 이상으로 나타났고,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가 갖는 공감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다가가는 공간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의 작가이며 작곡가인 아라이 만(1946-2021)의 지적을 새겨듣는다.
“기본적으로 모든 분쟁의 원인은 서로 잘 모르는 것이다. 서로를 알게 되면서 서로에 대해 친근감이 생기고, 친근감이 생기면 분쟁의 소지가 없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가 중요하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문화교류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