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 넘칠수록 사람들은 얼굴을 잃어버린다. 눈앞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쓸모나 인상으로 재단해버리는 것이다. 환대는 옛말이 되고, 낯선 얼굴은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 진단이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 있었다.
1940년, 한 유대인 청년이 프랑스군 장교로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전쟁포로로 분류되어 국제협약의 보호를 받았고,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런데 고향 리투아니아에 남아 있던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갇혀 있던 사람은 살아남았고, 자유로웠던 사람들은 죽었다. 이 잔혹한 반전 속에서 한 철학자의 생각이 자라났다.
그의 이름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나’ 중심의 서구 철학을 뒤집고 ‘타자’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세운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목이다.
레비나스는 물었다. “사람은 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토록 쉽게 무시하고 짓밟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우리는 늘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상으로 상대를 다 안 것처럼 재단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그렇게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얼굴이란 내 판단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스스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말에서도 얼굴은 흔히 ‘얼이 드나드는 굴’로 풀이된다. 겉모습 너머의 그 사람 자체가 나를 향해 건너오는 통로라는 뜻이다. 나보다 약하고 상처받은 그 얼굴이 말없이 건네는 부탁,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는 그 호소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다워진다고 그는 말했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철학은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는 윤리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의 생각은 성경의 두 장면과 닮아 있다.
야곱은 20년 만에 자신을 죽이려던 형 에서와 화해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세기 33장).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예수도 최후의 심판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했다(마태복음 25장).
그런데 흥미롭게도 레비나스는 그의 후기 저서에서 ‘대신 짊어진다’는 단어를 직접 썼다. 그는 이를 철학적 윤리로 멈추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그 단어는 곧장 십자가로 이어진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삶을 멈추고 남의 얼굴이 진 잘못을 대신 짊어진 사건. 레비나스의 사유가 멈춘 자리에서, 십자가는 그 문을 열고 들어와 대신 짐을 진다.
타향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보다 낯선 얼굴로 살아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 역시 또 다른 얼굴 앞에서는 쉽게 눈을 돌려버린다. 늦게 이민 온 사람, 말이 서툰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레비나스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 흔적은 타인의 얼굴 위에 남는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그 얼굴 하나가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었을지 모른다. 낯선 억양으로 길을 묻던 이웃,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 그 얼굴 말이다.
물질은 얼굴에서 눈을 돌리게 하지만, 신앙은 그 얼굴을 마주 보게 한다. 오늘, 그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문을 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