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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 읽기]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Los Angeles

2026.08.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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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물질이 넘칠수록 사람들은 얼굴을 잃어버린다. 눈앞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쓸모나 인상으로 재단해버리는 것이다. 환대는 옛말이 되고, 낯선 얼굴은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이 진단이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 있었다.
 
1940년, 한 유대인 청년이 프랑스군 장교로 있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전쟁포로로 분류되어 국제협약의 보호를 받았고,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런데 고향 리투아니아에 남아 있던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갇혀 있던 사람은 살아남았고, 자유로웠던 사람들은 죽었다. 이 잔혹한 반전 속에서 한 철학자의 생각이 자라났다.  
 
그의 이름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나’ 중심의 서구 철학을 뒤집고 ‘타자’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세운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목이다.
 
레비나스는 물었다. “사람은 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토록 쉽게 무시하고 짓밟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우리는 늘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상으로 상대를 다 안 것처럼 재단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그렇게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얼굴이란 내 판단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스스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말에서도 얼굴은 흔히 ‘얼이 드나드는 굴’로 풀이된다. 겉모습 너머의 그 사람 자체가 나를 향해 건너오는 통로라는 뜻이다. 나보다 약하고 상처받은 그 얼굴이 말없이 건네는 부탁,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아 달라”는 그 호소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다워진다고 그는 말했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철학은 인간의 얼굴을 마주하는 윤리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그의 생각은 성경의 두 장면과 닮아 있다.  
 
야곱은 20년 만에 자신을 죽이려던 형 에서와 화해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세기 33장).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예수도 최후의 심판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했다(마태복음 25장).  
 
그런데 흥미롭게도 레비나스는 그의 후기 저서에서 ‘대신 짊어진다’는 단어를 직접 썼다. 그는 이를 철학적 윤리로 멈추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그 단어는 곧장 십자가로 이어진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삶을 멈추고 남의 얼굴이 진 잘못을 대신 짊어진 사건. 레비나스의 사유가 멈춘 자리에서, 십자가는 그 문을 열고 들어와 대신 짐을 진다.
 
타향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보다 낯선 얼굴로 살아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 역시 또 다른 얼굴 앞에서는 쉽게 눈을 돌려버린다. 늦게 이민 온 사람, 말이 서툰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레비나스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 흔적은 타인의 얼굴 위에 남는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그 얼굴 하나가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었을지 모른다. 낯선 억양으로 길을 묻던 이웃,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 그 얼굴 말이다.  
 
물질은 얼굴에서 눈을 돌리게 하지만, 신앙은 그 얼굴을 마주 보게 한다. 오늘, 그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문을 열 수 있을까?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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