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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 번이나 살린 감자…조용히 죽어줬으면 했다 <김언수 소설 ‘도장집’ 3화>

중앙일보

2026.08.21 14:00 2026.08.24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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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24개국에 판권이 팔린 ‘K-느와르’의 대가 김언수 작가가 1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설계자들』, 『뜨거운 피』에 이은 ‘혐오 3부작’ 완결편 『도장집』을 매주 목요일 더중앙플러스에서 독점 연재합니다. 1993년 부산 앞바다 가상의 섬 ‘공도’에서 펼쳐지는 밀수와 혈투, 그리고 공존의 이야기입니다. 김언수의 신작을 더중플에서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1~4화까지 전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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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368
AI활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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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롭고, 또 외로운
카이저 픽업트럭이 축사 앞에 멈춰 섰다. 몽골 용병들이 짐칸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둘 다 덩치가 좋았다. 무슨 몽골 씨름단에서 바로 데려온 선수들 같았다. 용병 중 한 놈은 큼직한 반달 모양의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생선 대가리를 찍어내거나 염소나 양 같은 고기를 뼈째로 토막 낼 때 쓰는 칼처럼 보였다. 다른 놈은 손도끼를 쥐고 있었다. 용병들이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운전석 사내가 창문을 내리더니 용병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각진 얼굴, 눈썹이 진하고 골격이 굵은 전형적인 몽골 유목민 얼굴이었다. 저놈이 용병들의 대장 같았다.
AI사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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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반통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황소 같은 용병을 셋이나 데려왔지만 어쩐지 감자를 상대하자면 긴장이 될 것이다. 돈이 좀 깨지더라도 안전하게 한 서너 명 더 데려올걸,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잔반통은 허벅지 위에 놓인 가방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돈 가방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 감자에게 약속한 돈이 정말로 들어 있을지는 가방을 열어봐야 아는 일이었다. 설령 진짜로 돈을 넣었더라도 감자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식으로 쉽게 일을 마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몽골 용병들은 비싸다. 영하 40도의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거친 북방 유목인들은 선천적으로 힘이 세고, 강인하고,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잔반통이 가방과 물건을 교환하고 순순히 집에 갈 생각이었다면 몽골 용병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한 동남아 용병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수레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잔반통 따위와는 같이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인간은 혓바닥부터 내장 구석구석까지 믿을 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잔반통 잘못이 아니었다. 감자가 일을 망쳤다.

현장에서 얼굴을 들켰다. 이제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도 누가 물건을 훔쳤는지는 푸주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지금쯤 이 작업을 최초로 설계한 누군가는 아마 똥줄이 타고 있을 것이다. 차이나타운 주양은 물건을 회수했다고 점잖게 “오케이, 이제 됐네. 더는 시끄럽게 하지 맙시다” 하고 깔끔하게 접을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원청이 누구든 보스는 살아남는다. 좀 망신스럽고 지갑에서 속 쓰릴 만큼의 돈이 나갈 뿐이다. 언제나 죽어나는 것은 몸통 주변에 달린 곁가지와 팔다리다. 정말로 똥줄이 타는 건 중간에 낀 잔반통일 것이다. 물건도 회수해야 하고, 감자도 처리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꼬리를 자르고 시치미를 뚝 떼고 싶은 원청에게 제거되건, 더는 이런 멍청이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푸주 뒷골목에 엄중한 경고를 하고 싶은 차이나타운 주양에게 제거되건 잔반통도 청소부들에게 끌려와 이 늪지에 조용히 파묻힐 것이다. 지금 잔반통이 감자를 죽여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수레도 그랬을 것이다. 자기 살기도 급한 판에 감자까지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팔다리 따위가 뭔 힘이 있겠는가.

사실 이번 작업은 감자 같은 베테랑이 망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공도의 해안도로 모퉁이에서 대만산 밀수품을 잔뜩 실은 배달차를 기다린다. 배달차가 오면 트럭으로 들이받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 차에서 다른 물건은 가만히 놔두고 의뢰 받은 가방 하나만 살짝 꺼낸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 실제로 트럭은 배달차의 옆면을 제대로 들이받았다. 모퉁이 가드레일이 부서지면서 배달차는 10m 아래의 해안 자갈밭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런데 최소한 기절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배달부 중 한 명이 멀쩡하게 깨어 있었다. 여자였다. 감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여자는 한눈에 감자를 알아봤을 것이다. 키가 191㎝나 되고, 수세미 같은 곱슬머리에 대갈통은 수박만큼 크고, 허수아비처럼 어눌한 자세로 걷는 사람은 푸주에 많지 않으니까.

정체를 들켰다면 여자를 죽이고 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오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감자는 주춤했고, 2초쯤 눈만 끔뻑거리다가 여자를 그대로 놔둔 채 가방만 챙겨 나왔다.

왜 그랬을까?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서 죽음과 삶을 가르는 가파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신은 인간에게 대체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곧이어 119 구급대가 왔고 여자와 운전자는 병원에 실려 갔다. 운전자는 중상이었지만 여자는 차가 10m 아래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는데도 부러진 곳 하나 없이 찰과상만 입었다. 평소에 요가를 열심히 해서 몸이 부드러웠을 거라고, 이참에 우리도 다 같이 요가 학원이나 등록하자고 푸주 골목의 아줌마들은 수군거렸다. 화교 패거리들이 응급실로 찾아왔을 때 여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범인의 인상착의를 말했다. 키가 크고, 대갈통이 수박만 하고, 수세미에, 허수아비……. 그걸로 감자 인생은 끝난 것이었다.

수레는 그 여자를 알았다. 차이나타운 중화루(中和樓)에서 만두를 만드는 여자였다. 도장집 업무로 화교 주양을 만나러 중화루에 갈 때면 유리 칸막이 안에서 늘 만두를 빚고 있는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여자가 빚은 만두 맛은 그저 그랬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맛이었다. 특별한 향도 없고, 특별히 맵지도, 고소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좋게 말하면 밥이나 물처럼 일상적인 맛이고 나쁘게 말하면 뭔가 민숭민숭한 맛이랄까.
AI사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AI사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하지만 여자가 만두를 빚고 남는 시간에 밀수품 배달도 한다는 건 몰랐다. 감자가 꽤 자주 중화루에 와서 그 민숭민숭한 만두에 혼자 고량주 한 병을 비우고 갔다는 것도 몰랐다. 감자는 여자에게 말 한마디 못 붙여봤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감자는 늘 만두와 고량주를 주문하는 손님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른다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감자에게 감정이 있었다면 화교 패거리들이 범인을 물었을 때 1초 정도는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여자도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하면 감자가 죽는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다. 차이나타운 중화루는 주양의 본거지이고 그 건물 안에는 깡패와 밀수꾼과 브로커들밖에 없으니까.

몽골 용병 대장이 운전석 뒤에서 큰 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열고 권총을 몇 개 꺼내더니 용병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러시아제 구식 리볼버였다. 몽골 용병들이 실린더를 열어 총알이 제대로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용병 대장이 잔반통에게도 권총을 쓱 내밀었다. 잔반통이 뚱한 얼굴로 권총을 쳐다봤다. 이걸 내가 들고 있어 봐야 뭘 하겠냐는 표정이었다. 수레 생각도 그랬다. 잔반통은 권총 대신 차라리 벽돌을 들고 있는 편이 자신에게도 용병들에게도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잔반통이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권총을 받았다. 용병 대장은 산탄총을 꺼내 들었다. 실내에서 민첩하게 움직이기 위해선지 총신 앞부분을 조금 잘라낸 것 같았다. 그래서 놈의 산탄총은 마치 권총을 크게 뻥튀기한 것처럼 보였다.

용병대장이 차에서 내려 축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기웃거리더니 축사 안에 대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둠 속에서 내내 몸을 숨기고 있던 감자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레가 쌍안경으로 감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처참한 몰골일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주책없이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이제 와서 반가우면 도대체 뭘 어쩌자고 그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도장집 노인들은 감자가 이 하구에서 조용히 죽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감자가 살아 있으면 도장집에 곤란한 일이 한둘이 아녔다. 어쨌거나 감자는 도장집의 엄연한 조합원이었다. 차이나타운 주양은 “조합원이 잘못했으면 조합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 하고 도장집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도장집이 배상금 중 얼마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푸주 골목에서는 “다달이 조합비는 꼬박꼬박 잘도 받아 처먹더니만, 정작 조합원이 위기에 처하면 나 몰라라 내팽개치는 게 도장집이 하는 일이냐?” 하고 사람들이 웅성거릴 게 뻔했다.

감자가 살아서 계속 꿈틀거리면 푸주가 온통 복잡해진다. 차이나타운 주양 입장에서도 물건 하나 도둑맞았다고 전쟁을 일으키기는 또 그렇다. 전쟁은 항상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장사였다. 물건이 회수되고 배후가 밝혀지면 원청에게 배상금을 받고 조용히 합의할 수 있었다. 주양 입장에서는 물건도 회수했고, 체면도 세웠고 게다가 덤으로 합의금도 받는다. 나쁠 것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감자가 죽었을 때 이야기다. 차이나타운 물건을 훔치고도 감자가 멀쩡하게 푸주 골목을 활개치며 돌아다닌다면 주양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은 체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항구가 있는 한 뒷골목으로 밀수품은 계속 쏟아져 들어온다. 밀수품에 손대는 놈들 역시 계속 나온다. 그런 놈들은 기왕에 훔칠 거라면 아주 센 놈보다는 그나마 힘 빠진 놈의 물건을 훔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가장 허약한 놈을 먼저 사냥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타인의 내면에서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에 인간은 별 재능이 없다. 하지만 다른 인간의 허약함과 약점은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러니 큰 물고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놈들을 방치하는 것은 단지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댐에 뚫린 작은 구멍을 쥐새끼들이 하나둘 파먹기 시작하면 이 거대한 댐도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슬프게도 모두가 감자가 죽기를 원한다. 차이나타운 주양도,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원청도, 일 하나 잘못 맡았다가 중간에서 죽을 맛인 잔반통도, 되도록 푸주의 사건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찰들도, 심지어 감자의 홈그라운드인 도장집도, 모두 감자가 죽어서 이 사태가 조용히 가라앉기를 원한다. 지금쯤 물개여관 술집 테이블에 앉아서 도장집을 향해 원성과 빈정거림과 불만을 마구 쏟아내고 있을 푸주 골목의 사람들도 내심은 감자가 죽기를 원할 것이다. 전쟁이 나면 장사가 안 되니까. 여기저기 총과 칼이 난무하고, 거리가 피투성이가 되면 장사가 안 되니까. 신문에 기사가 나고, 들춰보면 죄다 불법인 푸주 골목 이곳저곳을 경찰이 자꾸 돌아다니면 장사가 안 되니까. 문득, 감자가 참 외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는? 너는 감자가 살기를 바라느냐?
수레의 목구멍 속에서 그 질문이 불쑥 올라왔다.

감자가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래야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무서워서 물어보지 않았다. 지프를 몰고 하구 삼각주를 달릴 때도, 눈 위에 떨어진 핏자국을 쫓을 때도, 얼음강을 건널 때도 수레는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수레 자신에게 감자를 살릴 수 있으면 살리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짓말일 것이다. 수레의 마음 깊은 바닥을 뒤적거려서 진실의 상자를 열어본다면 감자가 조용히 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누군가 감자를 조용히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수레가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감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여러 나라의 위조 여권, 세탁된 도피 자금, 다른 사람 이름으로 만든 은행 계좌, 밀항선, 신원보증 없이 장기 계약할 수 있는 주거지, 위급 상황을 대비한 통신 라인……. 항목은 끝도 없이 늘어난다. 한 사람을 해외로 밀항시키고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추적자들로부터 생존케 하는 데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돈과 위조 증명서들이 필요하다. 당연히 많은 브로커와 일을 해야 하는데, 브로커들은 대체로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놈들이다. 비밀이 유지될 리 없다. 게다가 도장집 올빼미도 설득해야 한다. 그 꼬장꼬장한 할매가 이 복잡하고 돈 안 되는 일을 허락하겠는가.

그래도 수레가 온갖 억지를 부린다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레는 열한 살 때부터 푸주에서 일했다. 수레보다 푸주를 잘 알고 수레보다 더 유능한 수리공은 없다. 하지만 너무 까다롭고 또 위험하다. 일이 틀어지면 감자뿐만 아니라 수레도 같이 늪 속으로 쓸려 갈 것이다. 솔직히 말해 가능성도 별로 없다. 수레에게는 감자 말고도 산더미처럼 많은 일이 쌓여 있었다. 하나를 처리하면 두 개가 더 쌓였다. 수리공의 삶은 피곤하고 또 피곤하다. 감자는 수레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 베트남 밀림에서 한 번, 푸주 뒷골목에서 한 번이었다. 수레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을 때 감자는 베트콩들의 AK47 총알이 빗발치는 밀림으로 되돌아와서 수레를 둘러업고 뛰었다. 그때 후퇴하는 부대원 중에서 수레를 살리겠다고 되돌아온 사람은 감자뿐이었다. 지금 수레가 나서지 않으면 감자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다. 감자라면 나섰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한계라는 게 있다. 너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인정해라. 이게 너라는 인간의 정확한 크기다. 그렇게 말하자 어떤 모멸감이 수레의 정수리에서 등줄기를 타고 항문까지 스르르 흘러내렸다.

몽골 용병들이 축사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잔반통은 용병들 뒤에 서 있었다. 감자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서 있었다. 감자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용병 대장이 먼저 축사 안으로 들어갔다. 손도끼를 든 사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잔반통이 맨 뒤에 들어갔다. 반달 칼을 쥔 사내는 무슨 경계라도 서려는 건지 축사 입구에 남았다. 용병 대장이 축사 깊숙한 곳까지 둘러보면서 내부를 재빨리 살폈다. 잠시 후 잔반통과 용병들이 모닥불을 앞에 두고 동그랗게 자리를 잡았다. 손도끼를 든 사내가 추웠는지 그 와중에 모닥불 열기에 손을 갖다 댔다. 용병 대장이 슬며시 몇 걸음 옮기더니 감자의 등쪽에 자리를 잡았다. 감자가 어깨너머로 용병 대장을 힐끗 쳐다봤다.
AI사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AI사용 이미지. 박소연 디자이너

물건부터 달라는 듯 잔반통이 손을 내밀었다. 어림도 없다는 듯 감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잔반통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감자 앞으로 휙 집어던졌다. 감자가 쭈그리고 앉더니 가방을 열어 지폐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돈의 액수가 맞는지, 혹시 가짜 돈을 쑤셔 넣진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몽골 용병들이 킬킬거리며 코를 처박고 한 장 한 장 돈을 세고 있는 감자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잔반통은 비웃지 않았다. 몽골 용병들의 저 여유는 감자를 잘 모르기 때문일 거라고 수레는 생각했다. 아니라면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액수가 맞는지 감자가 가방 지퍼를 닫았다. 잔반통이 이번에는 돈을 제대로 넣은 모양이었다. 잘한 짓이었다. 딸 졸업식에 의족 대신 멀쩡한 두 다리로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면 감자 같은 사내에게 신문지 따위를 쑤셔 넣은 돈 가방으로 장난질을 쳐서는 안 된다.

받을 것 받았으면 이제 물건을 내놓으라는 듯 잔반통이 양 손바닥을 펼쳤다. 감자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그것은 목욕탕 옷장 열쇠처럼 보였다. 싸구려 팬티 고무줄에 플라스틱 번호판과 열쇠가 함께 달린 뭐 그런 종류 말이다. 잔반통이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집더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는 듯 감자를 쳐다봤다. 몹시 짜증이 나는 얼굴이었다.

감자가 던진 것은 도깨비 창고 열쇠일 것이다. 도깨비 창고는 밀수품이나 장물을 보관해 주는 창고였다. 공도에서는 주로 할머니들이나 아줌마들이 이런 도깨비 창고를 운영했다. 자기 집의 다락방, 지하실, 지붕 틈, 우물 속, 김치 항아리, 아궁이 같은 곳에 몰래 비밀 공간을 만들어놓고 밀수꾼, 도둑, 소매치기, 세탁업자들의 물건을 맡아줬다. 산꼭대기까지 이어진 공도의 복잡한 피난촌 골목에는 그런 도깨비 창고가 만 개도 넘게 있었다.

잔반통이 열쇠를 손가락에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더니 감자에게 뭐라고 떠들어댔다. 아마 창고 위치를 물었을 것이다, 감자는 자기가 안전해지면 그때 도깨비 창고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잔반통은 약이 바짝 오른 얼굴이었다. 잔반통이 결국 권총을 꺼내 감자를 겨눴다. 용병 대장도 즉시 산탄총을 겨눴다. 감자가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 손바닥이 보이도록 양손을 들어올렸다. 용병 대장이 산탄총을 겨누며 감자의 어깨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감자가 칼이나 총을 꺼낸다면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손도끼를 든 사내도 신호만 떨어지면 달려들겠다는 듯 태클 자세로 몸을 낮췄다. 감자가 양손을 올린 채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세 걸음 정도 물러서자 등이 축사 벽면에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은 없어 보였다. 모닥불이 바람에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서로 노려본 채 30초쯤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30초의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잔반통이 마지막이라는 듯 권총을 겨눈 채 뭐라고 질문을 던졌다. 감자가 뚱딴지같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웃기게도 모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뭐지?’ 덩달아 수레도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지나치게 밝아진 보름달이 하품이라도 하듯 시큰둥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양철지붕을 떠받치던 대들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붕을 지지하던 목조 크러스트가 부서지면서 순식간에 양철지붕, 대들보, 서까래 같은 것들이 모닥불 주변으로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잔반통과 도끼를 든 사내가 지붕 파편들을 맞고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용병 대장이 지붕에서 떨어지는 들보에 어깨를 맞고는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쓰러지는 와중에도 감자를 향해 산탄총을 두 발이나 쏘았다. 축사 벽면에 딱 붙어서 잔해물들을 피하고 있던 감자가 총에 맞았는지 몸을 움찔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축사 입구에서 멍하니 보초를 서고 있던 반달 칼 사내가 축사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다. 이내 축사 안쪽에서 우당탕 난장판이 벌어졌다. 무너진 양철 지붕과 나무 기둥 사이로 뿌연 먼지들과 눈송이가 날아다녔다. 지붕 한쪽이 완전히 내려앉아서 수레가 있는 위치에서는 축사 안의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산탄총 소리가 한 번 더 들렸고 권총 소리는 여러 번 들렸다. 누가 누구에게 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중국 그림자극에 나오는 인형들처럼 그림자들끼리 벽면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엿 같은.”
수레가 쌍안경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축사를 향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발걸음이 허둥댔다. 눈 쌓인 언덕길을 뛰어 내려오면서 수레는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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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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