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엔비디아가 AI 서버 가격을 15% 이상 올린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 급등으로 비용 압박이 커지자 제품 인상에 나선 것이다. AI 투자 열풍에 ‘몸 값’이 높아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업체의 협상력은 커졌지만, 치솟은 메모리 가격이 다시 기업들의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을 밀어 올리며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22일(현지시간)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엔비디아 AI 반도체를 탑재한 상당수의 서버 가격이 15% 넘게 인상된다고 보도했다. 인상된 가격은 내년 초 출하 분부터 적용된다. 차세대 제품인 ‘베라 루빈’과 현재 주력인 ‘그레이스 블랙웰’ 탑재 시스템도 대상이다.
박경민 기자
이번 가격 인상의 배경에는 메모리 품귀 현상이 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가 제 성능을 내려면 고대역폭메모리(HBM)가 필수다. HBM은 D램을 여러 층 쌓아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도록 만든 고성능 메모리다. 생성AI 모델이 커지고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늘수록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데이터를 빠르게 공급하는 메모리의 중요성도 높아진다.
글로벌 D램 생산의 대부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3개 업체가 담당한다. 세 회사 모두 생산을 늘리고 있지만 AI 데이터센터 투자로 HBM과 서버용 D램 수요가 급증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서버용 D램 계약가격은 올해 2분기 전분기 대비 53~58% 오른 데 이어 3분기에도 13~18% 추가 상승할 전망이다. 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에 빅테크의 장기공급계약(LTA) 확대까지 겹치면서 당장 확보할 수 있는 메모리 물량도 빠듯해지고 있다.
애플과 퀄컴에 이어 엔비디아까지 제품 가격을 올리는 것이 이런 시장 상황을 보여준다. 엔비디아는 매출에서 제품 원가를 뺀 매출총이익률이 75%에 이를 정도로 수익성이 높은 기업이다. 블룸버그는 이런 엔비디아조차 비용을 제품 가격에 반영했다는 건, 메모리 가격을 점점 더 비싸게 받아도 될 정도로 메모리 업체의 협상력이 강해진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는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자체 AI 반도체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데, 여기에도 HBM 등 고성능 메모리가 필요하다. 엔비디아의 독주체제와 별개로 메모리 업체들의 위상이 높아졌단 얘기다.
이런 수급 구조는 HBM 시장의 양대 강자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중장기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AI용 고성능 메모리는 기술 난도가 높고 고객사 품질 검증과 생산능력 확대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AI 인프라 투자가 이어질수록 두 기업에 유리한 환경이 지속될 거란 분석이다.
반면 AI 생태계의 한쪽에선 비용 부담이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일부 서버 업체는 고객사에 엔비디아의 주요 AI 서버 시스템 가격이 약 17% 오를 수 있다고 알렸다. 이 경우 1기가와트(GW)급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이 추가로 최소 50억 달러(약 6조9000억원) 늘어날 수 있다. AI 투자 열풍이 불러온 메모리 가격 상승이 다시 AI 투자 비용을 끌어올리는 ‘AI 붐의 청구서’인 셈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3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GTC 2026’ 기조연설에서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을 소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엔비디아는 오는 26일(현지시간) 2분기 실적을 발표한다. 비용 상승에도 AI 가속기 수요가 성장세를 이어갈지가 관전 포인트다. 엔비디아가 내놓을 향후 실적 전망은 빅테크의 AI 인프라 투자 열기가 지속할지 가늠할 지표가 될 전망이다.
신중호 LS증권 리서치센터장은 “AI 인프라 구축 비용이 계속 높아지면 빅테크도 지금과 같은 투자 속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메모리 가격 상승이 엔비디아의 시스템 가격을 거쳐 고객사에 전가되는 구조가 이어질 경우 AI 데이터센터 투자의 수익성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