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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친일 아니면 반일만 기억되는 시대

중앙일보

2026.08.23 08:14 2026.08.2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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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 도쿄총국장

유성운 도쿄총국장

2008년 프랑스 칸 영화제 출장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재밌게 봤었다. 얼마 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를 다시 보러 갔더니 달라진 점이 있었다. 칸에서 ‘좋은 놈’ 박도원은 돈만 좇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는데, 서울에서는 독립군 자금을 모으는 열사로 돼 있었다. 왜 바뀌었냐고 묻자 홍보사 측은 “잘 아시면서”라며 웃었다. 그게 대중 감성에 더 맞는다는 의미로 들렸다.

일제강점기가 시대적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는 대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김두한이 종로에서 깡패로 살았던 것도(드라마 ‘야인시대’), 비밀 클럽에서 조난실이 댄서로 활동하는 것도(영화 ‘모던보이’) 다 독립운동을 위해서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세 남자의 추격전을 다뤘다. [중앙포토]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세 남자의 추격전을 다뤘다. [중앙포토]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어간 독립운동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대 한국인들은 친일파도 아니고 항일투사도 아니었던 사람이 99%였을 것이다. 어느 쪽도 아닌 평범한 이들의 삶은 그대로 묻혀져도 괜찮은 것일까.

도쿄에 부임하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스기야마 도미(杉山とみ). 192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1941년 대구 달성초등학교 4학년 담임으로 교단에 섰다. 5년 전 여름, 아사히신문은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수십여 년간 대구에서 가르쳤던 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그녀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녀는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반감을 해방 뒤에야 알게 됐다. 교단에서 조선 학생들에게 황민화 교육을 시킨 데 대한 자책감에 시달렸지만, 전후 제자들과 다시 교류하면서 고통을 조금씩 덜어냈다고 한다. 그녀는 1972년 삿포로 주재 한국 영사로 일하고 있던 제자 김정섭과 연락이 닿았다. 이들은 27년 만에 만나 ‘아리랑’을 같이 불렀다고 한다. 1976년에는 한국을 찾았다. 김포공항에는 제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녀를 만나 학생들과의 추억에 대해 더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2023년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스기야마와 제자들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의 삶을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으로만 재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뿐이었을까. 이분법이 강요되는 사회에서는 평범한 삶이 허용될 공간은 좁아진다. ‘적당히’ 현실에 안주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거물 친일파나 독립운동 열사 뿐 아니라 ‘대단치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역사는 선악을 가르는 판결문이기 전에, 그 시대를 살아간 다수 사람의 기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성운([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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