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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헌법 위에 관례 있나

중앙일보

2026.08.23 08:20 2026.08.2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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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최고법원 판사(대법관)를 임명할 때 우리처럼 사법부 수장에게 제청권을 부여하는 나라는 드물다. 미국의 연방대법관 지명은 온전히 대통령의 권한이다. 독일·영국·프랑스 등은 정부·의회·사법부 등이 참여하는 독립 기구에서 선출하거나 추천한다. 일본은 사법부 의견을 존중하는 관행이 확립돼 있지만, 별도의 제청 없이 내각이 임명권을 행사한다.

독재 공포에서 생긴 대법관 제청권
삼권분립 출발은 대통령 권력 자제
반려 대신 국회 동의 절차에 부쳐야

한국이 대법원장의 제청권이라는 장치를 둔 배경에는 독재에 대한 공포가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처럼 행정부 수반의 포괄적 임명권을 원했다. 반면에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신생 공화국의 사법 독립을 위해 사법부의 제청권이 필수라고 맞섰다. 갈등 끝에 1949년 제정된 법원조직법에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명은 법관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한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김병로의 소신에는 법관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대륙법계 전통도 작용했다.

사법 독립 장치로 설계된 대법관 제청권이 유신과 5공 때는 오히려 정치권력의 사법 장악 통로로 변질하기도 했다. 사법부 내 회의체에서 대법원장 1인으로 제청권이 넘어가면서 정권과 사법 수장 간의 ‘밀실 거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987년 헌법에서 국회 동의 요건이 생기고, 2011년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후추위)가 도입된 것은 이에 대한 반성이었다.

헌정사를 거치며 대법관 인선은 대법원장의 제청권, 국회의 동의권, 대통령의 임명권이라는 세 권력이 맞물리는 미묘한 영역이 됐다. 모호한 권한의 경계는 사전 조율이라는 ‘관례’로 봉합됐다. 그러나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의 제청을 둘러싼 청와대와 조희대 사법부의 충돌은 그 신사협정이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청와대는 관례 위반을 비판하며 손 후보자에 대한 거부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날 동일한 절차로 제청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수용하겠다는 태도다. 이는 ‘절차적 관례 위반’이 명분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낳는다. 청와대가 선호했던 김민기 수원고법 판사를 낙마시켰다는 것이 솔직한 이유 아닌가. 김 판사가 오영준 헌법재판관의 배우자라는 점에서 사법부가 우려했던 이해충돌 소지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사전 조율이라는 관례가 깨진 이상 이제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제청을 반려해 사법부에 재제청을 요구하거나, 제청안을 그대로 국회에 넘겨 동의를 묻는 것이다. 원안의 부결이라는 점에선 다를 바 없겠지만, 삼권분립 관점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확연히 다르다.

‘권력의 자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국회 동의 절차에 부치는 것이 온당하다. 청와대가 제청을 반려하는 순간,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덜기 위해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다는 의구심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헌법상 절차인 국회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안전하다.

혹자는 미국 제도를 들어 선출 권력의 대법관 임명 우선권을 주장하지만,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대통령 4년 임기 동안 임명하는 대법관이 평균 2명 안팎에 그친다. 반면에 대법관 6년 임기제와 70세 정년을 채택한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5년 동안 임명하는 대법관 수가 평균 10명을 상회한다. 더욱이 이재명 대통령은 향후 법 개정을 통한 대법관 증원까지 고려하면 임기 내 자신이 임명하는 대법관 수가 22명이나 된다. 모두 26명이 될 대법관의 85%가 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최고 권력자가 절제하지 않는다면 삼권분립은 구조적으로 무너질 위험이 크다.

내년 6월이면 조희대 대법원장이 정년으로 물러난다. 후임 대법원장은 추천위 절차 없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대법관 단 한 석의 제청을 두고 사법부 수장을 거칠게 몰아세우는 현 권력의 태도를 보면, 대법원장 교체 이후 사법부의 위상이 벌써 걱정스럽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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