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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근대화 실패 중국, 승리 도취한 일본…그 끝은 패망이었다

중앙일보

2026.08.24 08:10 2026.08.2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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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부 답사하며 회고한 100년 전 격동기의 교훈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방학을 맞아 학생들과 함께 중국 동부에 답사를 다녀왔다. 산둥성의 웨이하이와 칭다오·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톈진, 그리고 괴뢰 만주국의 출발점이 되었던 다롄을 다녀오는 경로였다. 4차 혁명의 변곡점의 시점에서 19세기 말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었던 지역을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와 함께 걸었다.

‘총알’만 한 일본에 당한 중국, 웨이하이의 패전 기념관에 인산인해 관객
톈진에서 조선 볼모 잡은 청, 시모노세키에서 항구 개방 등 굴욕 조약
안중근 수감 뤼순 감옥 있는 다롄, 일 괴뢰 만주국 거점, 승전탑 등 남아
4차 산업혁명기 공전의 성공 거두는 한국, 과거·현재 두루 돌아봐야

중국 산둥성의 웨이하이 앞바다 류궁다오(유공도)에 있는 갑오전쟁(청일전쟁) 박물관. [중앙포토]

중국 산둥성의 웨이하이 앞바다 류궁다오(유공도)에 있는 갑오전쟁(청일전쟁) 박물관. [중앙포토]

웨이하이와 청일전쟁
첫 방문지였던 웨이하이는 청일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었다. 웨이하이 앞바다에는 유공도라는 섬이 있고, 여기에 당시 청나라의 북양함대 사령부와 청일전쟁의 중국식 표현인 갑오전쟁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웨이하이는 랴오둥반도의 다롄과 함께 중국의 보하이만을 봉쇄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영국이 홍콩처럼 웨이하이를 조차하려고 했고, 일본은 청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웨이하이를 점령함으로써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고자 했다. 패배한 중국의 기념관이 승리한 일본의 일청강화조약기념관(시모노세키 소재)에 비해 수십 배는 큰 규모였다. 거의 다녀가는 사람이 없는 일본의 기념관에 비해 중국의 기념관은 인산인해의 관람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음에도 중국은 왜 이렇게 큰 기념관을 지어서 기념하는 것일까? 이긴 전쟁보다 승리하지 못한 전쟁에서 더 큰 교훈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성공적이었던 메이지 유신에 비해 실패했던 중국의 근대화 과정, 특히 중국의 표현을 빌리자면 ‘총알’만 한 일본에 패했던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키고 싶지 않았던 청나라 정부
다른 한편으로 당시 중국 지사들이 주목했던 바와 같이 청일전쟁은 중국이라는 민족을 찾아준 전쟁이기도 했다.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했던 원인 중 하나는 청나라 정부가 지켜야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정부였기 때문이었다. 부패한 정부이기도 했고, 소수민족의 정부이기도 했다. 바뀌어야 할 정부를 굳이 지킬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가 상황을 바꾸었다.

다수민족이냐, 소수민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 전체가 무너질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소수민족 우대정책보다 하나의 중국 정책이 강화되는 최근의 정책과 유사한 상황이 청일전쟁 직후에 나타났고, 이는 결국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한 나라 안에서의 분열된 인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1960년대 남베트남뿐만 아니라 19세기 중국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 도시인 칭다오는 모두에게 맥주로 유명한 곳이다. 주지하듯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이 칭다오를 식민지로 하면서 독일 맥주회사가 진출했고, 이로 인해 칭다오 맥주는 하얼빈 맥주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되었다. 그래서 칭다오 맥주 공장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칭다오 맥주도 관심이지만
칭다오에 있는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 [중앙포토]

칭다오에 있는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 [중앙포토]

많은 한국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중국인들이 칭다오를 찾지만, 이 중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1914년 칭다오에서 독일과 일본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승리한 일본은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어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참여했다. 1920년대에는 미국·영국과 함께 워싱턴 군축조약에 참여하는 등 세계 열강의 하나로 부상했다.

1907년에 이미 헤이그 국제회의에 참여했던 일본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실질적인 군사 강국의 대우를 받으면서 국제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는 한국에서 3·1운동, 그리고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산둥반도는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고, 열강들은 승전국 일본에 넘겼다.

칭다오의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측 벙커. [사진 박태균]

칭다오의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측 벙커. [사진 박태균]

아울러 승전국으로 인정받은 일본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던 칭다오와 함께 남태평양의 주요 도서들에 대한 위임통치를 했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기 때문에 더는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열강들은 위임통치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눈가림에 불과했다.

위임통치의 실상과 반탁운동
일본은 남태평양 섬들을 철저하게 군사 기지화했다. 식민지가 아니기 때문에 총독부를 세울 수 없었고, 이에 남양청이라는 기관을 세웠다. 조선과 타이완에서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남태평양의 섬들을 군사 요새화했다. 사이판이나 팔라우는 그 대표적 경우였다. 진주만 습격 이후 태평양전쟁은 해군의 전쟁이었으며, 이는 일본이 위임통치하는 섬들을 점령하면서 일본 본토에 폭격할 수 있는 불침항모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3년 미국·영국·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약속했던 카이로 선언에서도 일본이 ‘탐욕에 의해 점령했던 지역’과 ‘1914년 이후 점령한 지역을 원래의 상태대로 돌려놓는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일본이 위임통치했던 지역들이 군사기지가 되었고, 일본의 침략 전쟁 가능성이 미국을 비롯한 자유 국가들의 전략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광복 직후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운동을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반탁운동은 친일파 전범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은 달랐다.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라는 이름 아래 군사기지화가 진행되는 실상을 정확히 파악했다. 이들은 일본 패망 이전에 위임통치의 부당성을 신문에 게재했고, 열강에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를 청원한 한국인들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으로 올라간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을 방문한 일본인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근대화에 성공해 열강에 올라간 일본은 부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힘이 부강해진 상황에서 잠시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던 일본은 결국 원자탄 폭격을 당해 패망했다. 과연 오늘 일본의 젊은이들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아 패망했던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을까?

이홍장과 위안스카이의 흔적
이홍장

이홍장

톈진과 다롄 역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톈진은 갑신정변 지원에 실패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 이홍장 북양대신을 만났던 곳이다. 어쩌면 이토 히로부미는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10년 전의 복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역사상 유례가 없이 청나라에 큰 수모를 준 조약이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이홍장은 극우 청년의 총탄에 눈에 상처를 입었다. 엄청난 배상액은 둘째치고, 제1항에서 전쟁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조선을 중국과의 조공외교관계로부터 분리했다. 중국의 주요 항구를 모두 개방했다. 국제적 관행을 어기고 협상 중에 타이완을 침공하여 결국 타이완을 식민지화했다. 일본의 탐욕에 놀란 유럽의 간섭으로 다롄 지역을 다시 중국에 돌려주기도 했다. (삼국간섭)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

톈진에는 이홍장과 위안스카이의 발자취가 유독 많이 남아 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청은 조선과 무역협약을 맺었다. 조공 외교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문서 조약이었다. 여기에서 청은 조선을 속국이라 규정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여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의 역사적 기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톈진에 있는 위안스카이(원세개)의 집. [사진 박태균]

톈진에 있는 위안스카이(원세개)의 집. [사진 박태균]

톈진은 근대개혁을 배우고자 했던 조선의 영선사가 파견되었던 곳이었고, 위안스카이의 집이 남아 있다. 청의 향기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 중국 정부는 최근에서야 상하이협력기구 회의가 열리면서 톈진 개발이 다시 시작된 느낌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던 민족의 최후
다롄에 있는 일본의 러일전쟁승전탑. [사진 박태균]

다롄에 있는 일본의 러일전쟁승전탑. [사진 박태균]

마지막 지역인 다롄은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재판 이후 사형당했던 뤼순 감옥이 위치한 곳이면서, 러일전쟁이 진행된 지역이다. 일본의 승전탑이 있다. 일본에 다롄은 괴뢰 만주국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다롄에서 선양·장춘, 그리고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괴뢰 만주국의 핵심이었다. 한국군 기원의 한 축은 장춘의 군관학교로부터 시작되었고, 관리양성학교였던 대동학원에는 조선인 졸업생도 있었다.

아쉽게도 학생들과 톈진과 다롄까지 동행하지 못했지만, 사전 강의를 통해 현지 방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힘이 없는 국가, 시대적 과제였던 근대화에 실패했던 조선과 청은 거대 전환기에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다. 지도자들과 지사들은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국민은 분열되어 있었다.

일본의 성공은 유례가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젊은 지사들은 일본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다. 1차 세계대전 승리까지만 해도 일본의 장래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청일전쟁부터 승리에 도취했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전진했다. 그리고 그 끝은 패망이었다.

지금 한국은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밖에서 보면 한국의 성공은 유례가 없는 것이며, 장래도 밝게 보인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전환기에서 바로 지금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한번 돌아봐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1920년대 다이쇼 시대와 1980년대 일본, 세계 최강국이 된 2000년대의 중국, 그리고 지금의 한국이 전진만 계속한다면 그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내년에는 한국과 일본 근대사 답사를 학생들과 함께해야겠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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