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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의 문화노트]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중앙일보

2026.08.25 08:10 2026.08.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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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 문화선임기자

정현목 문화선임기자

배우 하영의 수난은 ‘셀프 파묘’다. 의사 집안 자랑을 하다가 증조부의 친일 내력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파묘’란 단어를 일상어로 끌어올린 영화 ‘파묘’ 또한 친일파 후손의 업보를 소재로 삼았다. 마이너 장르였던 오컬트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모은 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항일 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영 증조부 논란 때문에 소환된 드라마들도 있다. 드라마 ‘대행사’(JTBC)에서 주인공 한나(손나은)는 한·일 관계 운운하는 재벌가 친구에게 쏘아붙인다. “말하는 게 역시 친일파 후손답네. 너네 할아버지 조선총독부에 비행기 헌납했잖아. 그렇게 사업해서 재벌 된 거고.”

드라마 ‘멜로가 체질’(JTBC)에도 친일파 후손 에피소드가 있다. 친일파 후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은정(전여빈)에게 청년사업가 홍대(한준우)는 다른 친일파 후손들은 물론, 을사오적의 적통인 외삼촌까지 소개해 준다.

친일파가 대중 콘텐트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친일파 조상의 죄를 후손이 떠안는 이유는 간단하다. 식민 지배를 겪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해방 후 일제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는 친일과 반일, 이분법 구도의 역사는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숨죽이며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매국노들은 안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부역했다. 예민한 풍향계처럼 바람보다 빨리 누웠던 기회주의자였다. 그렇게 부를 축적했고, 해방 후에도 세월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영화 ‘암살’에서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며 독립군 동지들을 팔아넘긴 염석진(이정재). [사진 쇼박스]

영화 ‘암살’에서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며 독립군 동지들을 팔아넘긴 염석진(이정재). [사진 쇼박스]

하영 증조부 논란을 계기로 친일파 조상의 과오를 후손이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역사 속 선택과 책임의 무게에 대해 다 같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영화 ‘암살’에서 일제 밀정 노릇을 한 염석진(이정재)은 해방 후 자신을 처단하려는 옛 독립군 동지의 총구 앞에서 항변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일제 강점기 역사는 점점 더 멀어져 가지만, 기회주의의 망령은 지금도 여전히 아른거린다. 12·3 내란 때도 ‘내란이 성공할지 모른다’며 내란 세력에 협조한 이들이 있었다.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사익을 챙기려 했던 그들은 21세기의 염석진들이다.

다행인 건, 친일파와 달리 그들에 대한 단죄가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이다. 집안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친일파 스캐너’가 화제라고 한다. 이렇게나마 과거를 똑바로 응시하게 된 건, 하영 증조부 논란의 긍정적 효과다. ‘업보에 시차(時差)는 있을지언정, 오차(誤差)는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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