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화면 위로 푸치니의 아리아 ‘그대 찬 손’이 흐른다. 감미로운 음률은 22년 전 어느 하루 기억을 오롯이 불러온다.
그때, 훗날 남편이 된 론과 렌터카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뮌헨에서 빈을 향해 가는 길에 잘츠부르크에 들렀다. 고풍스러운 골목길에 빠져 걷다 보니 배가 출출해져 왔다. 중세의 품격이 느껴지는 맥도날드 간판이 보였다. 론이 햄버거라도 먹자며 식당에 들어서 주문할 때, 나는 빈에 가서 근사한 식사를 하겠다고 미루었다.
이윽고 빈에 들어섰다. 웅장한 국립 오페라 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 걸린 라보엠 포스터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예술의 도시에서 좋아하는 작품을 마주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서로 눈빛만으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4유로짜리 입석 티켓은 있었다. 두세 시간이 남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줄을 섰다. 허기가 밀려왔다. 한 사람은 자리를 지켜야 했기에 직원에게 혼자 나가 먹을 것을 좀 사와도 되겠냐고 묻자, 나가면 재입장은 절대 불가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진리였다. 4유로 오페라를 위해 허기를 삼키는 동안 햄버거 생각으로 예술적 허세는 무너져 내렸다. 결코 내 배고픔을 달래주지 못할 예술의 가치와 당장 허기를 채워줄 빵 한 조각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머리에선 화려한 극장 안의 선율을 쫓고 있었으나, 텅 빈 뱃속이 전해오는 아우성에 무력하기만 했다.
드디어 입장, 입석 자리는 극장 천장과 거의 맞닿는 곳이었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객석 가까이 무대는 장난감 세트 같았다. 하지만 오페라 본고장 국립극장에서 푸치니 ‘라보엠’을 감상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둥근 천장을 타고 흐르는 푸치니의 완벽한선율에 배고픔도 잠잠해졌다. 단돈 4유로 입석 표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그저 기뻤다. 론과 처음 나선 여행, 고단함마저 낭만이 되어 가슴 뿌듯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입석의 고단함은 낭만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되지 않았다. 다리는 저려 왔고 허기와 피로로 온몸이 떨렸다. 가난 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는 무대 위 연인들처럼, 나 역시 론에게 온전히 기대어 있는 동안 오페라는 4막에 접어들었다.
무대 위 차가운 다락방에서 미미가 결핵과 굶주림으로 숨을 거두던 순간, 피로와 허기에 지친 나 역시 무너져 내렸다. 입석 객석에서 미미라도 된 듯 시야가 흐려지고 사방의 소리가 잦아들더니 나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난한 루돌포가 미미를 안고 절규할 때, 론은 나를 업고 얼마나 떨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극장 로비 벤치에 기대있었다.
나와 첫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준비한 프러포즈로 나를 놀라게 했던 다정한 남자. 당황한 론은 미국에 사는 의사 형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형은 공복 증후군이니 당장 식당으로 가라 했단다. 어느새 일흔이다. 되돌아보니 인생의 눈부신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소동 속에 있었다. 허기마저 아름답게 물든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