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스틸 주한미국대사가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정식 국회의장과의 접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정치권에선 정치인의 말보다 발을 좇으라는 말이 있다. 하원 재선 의원 출신인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2일 이재명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일본과 이스라엘, 캐나다 대사를 잇달아 만났다. 공교롭게도 세 나라는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던진 안보ㆍ중동ㆍ통상 현안과 맞닿아 있다. 외교가에선 스틸 대사의 동선이 미국의 당면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시작은 일본이었다. 스틸 대사는 지난 24일 미즈시마 고이치(水嶋光一) 주한 일본대사를 만난 뒤 엑스(X, 옛 트위터)에 “(한ㆍ미ㆍ일) 3국 간 지속적인 공조를 통해 평화롭고 안전하며 번영하는 인도태평양이라는 공동의 비전을 함께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지난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ㆍ미 연합훈련의 대폭 축소를 지시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대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상황에서 이뤄진 만남이었다. 북ㆍ미 대화 과정에서 북핵을 사실상 용인할 경우 한국과 일본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미국의 동맹 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높아진 상황에서 한ㆍ미ㆍ일 안보협력의 틀은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미셸 스틸 주한 미국대사(가운데)가 라파엘 하르파즈 주한 이스라엘대사(오른쪽 두 번째)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두 번째는 스틸 대사의 남편 숀 스틸 변호사. 사진 스틸 대사 X
트럼프가 연합훈련 축소 방침을 밝힌 같은 글에는 이란 문제도 등장했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이란 비핵화 노력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사양하겠습니다!(No thanks!)”라는 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스틸 대사가 일본 대사에 이어 24일 회동 사실을 공개한 상대는 중동전쟁 당사국인 이스라엘의 라파엘 하르파즈 대사였다. 이 자리에는 그의 남편이자 미 공화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숀 스틸 변호사도 함께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에서는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경제적 배제 작전’을 발표하며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개인과 기관까지 겨냥한 2차 제재 확대를 예고했다. 제재의 그물이 넓어지면서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도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다. 중동전의 파장이 한국 턱 밑까지 다가온 셈이다.
스틸 대사가 다음 날인 25일 회동 사실을 공개한 상대는 필립 라포르튠 주한 캐나다대사였다. 캐나다는 트럼프의 통상 압박에서 전통적 우방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ㆍ캐나다 무역협상이 결렬된 뒤 미국은 지난 22일부터 200억 달러 규모의 캐나다산 수입품에 50% 관세를 부과했다. 캐나다도 25일 같은 규모의 미국산 수입품 약 700개 품목에 15~50%의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역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이행을 비롯해 관세와 쿠팡 등 통상 현안이 걸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AP=연합뉴스
한 소식통은 “의례적인 상견례 성격이 강하지만 상대국과 만난 시점을 보면 미국의 관심사가 어디에 쏠려 있는지 엿볼 수 있다”며 “세 나라가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압박하거나 요구하는 현안과 맞물린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