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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곶감

Los Angeles

2026.08.2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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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희 / 수필가

김윤희 / 수필가

입추가 지났지만 아직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계절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 집 처마 밑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잘 익은 감의 껍질을 얇고 매끄럽게 돌려 깎아,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에 줄줄이 끼워 매달았다.
 
햇살이 비껴가는 그늘진 바람길에 달아두면 떫고 딱딱했던 감은 서서히 속살을 부드럽게 익히며 겉부터 꾸덕꾸덕 말라갔다. 바람을 맞고 시간이 얹힐수록 떫은맛은 사라지고 표면에 하얀 분이 피어오르면 깊은 단맛이 배어든다. 기다림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맛이다.
 
어린 시절 오빠와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곶감 줄 밑에서 까치발을 들고, 맨 아래 매달린 곶감부터 몰래 한 입씩 베어 물곤 했다. 말랑한 과육이 입안 가득 퍼지면 세상에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었다. 남은 곶감은 다시 조심스레 걸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줄이 비어 있는 것을 두 분이 모를 리 없었다.
 
“허허, 어떤 도둑고양이가 와서 이렇게 맛있는 곶감을 홀랑 먹고 갔을꼬.”
 
우리 남매의 엉성한 속임수에 속으신 것이 아님을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철없는 손주들을 나무라지 않는 너른 품이었고, 정성껏 말려낸 단맛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었던 넉넉한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오빠와 몰래 먹었던 것은 곶감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곶감을 만드는 풍경도 달라졌다. 이제는 시장에 가면 사철 곶감을 손쉽게 살 수 있고, 냉장·냉동 기술은 계절의 맛마저 붙잡아 둔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삶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건너뛴 채 결과부터 원하고, 깊어지기도 전에 결실을 재촉한다. 비워 내고 견디는 과정 없이 얻은 달콤함이 어딘가 허전한 것은, 그 안에 시간이 빚어낸 깊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곶감이 익어가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의 숙성에 대해 생각한다. 감은 나무를 떠난 뒤에도 긴 시간을 견뎌 깊은 맛을 완성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젊은 날에는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빴고, 작은 상처에도 쉽게 아파하며 떫은맛을 내곤 했다. 그러나 세월의 비바람을 지나며 마음의 껍질을 벗겨내고, 욕심을 덜어내며 조급함을 말리다 보면 어느 순간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깊이가 생긴다.
 
 어릴 적 조부모님이 도둑고양이 핑계를 대며 모른 척 웃어주셨던 그 너른 품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 삶의 곶감 줄에서 누군가 마음껏 단맛을 따 먹을 수 있도록 밑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익어간다.
 
가을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디며 깊어지는 곶감처럼, 나 역시 세월이 쌓일수록 곁에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단맛을 나누는 사람으로 익어가고 싶다. 곶감은 그저 감이 마른 것이 아니다. 시간을 견디며 단맛을 품은 사랑의 흔적이다.
 
 올가을에는 나도 감을 깎아 발코니에 매달아 보리라.

김윤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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