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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타로 권하는 사회

중앙일보

2026.08.27 08:06 2026.08.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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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현진건이 단편 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썼을 때의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는 암울했다. 일제 치하에서 3·1 운동은 실패하고 지식인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만나면 대폿집으로 향했고 서로의 울분과 한탄을 주고받곤 했다.

술이 삶의 유일한 출구이자 위로가 되었던 이런 사회 분위기를 신문기자 출신의 작가는 “그 몹쓸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요즘은 술보다는 “타로 권하는 사회”라고나 해야 될지 모르겠다. 타로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 현상처럼 대학가 주위에 유력 상권화되어 있다.

불안한 2030 사이에 타로점 열풍
카라바조 ‘점쟁이’ 속 청년에
꿈 박탈당한 한국 청년 겹쳐 보여

카라바조, ‘점쟁이(The Fortune Teller)’, c.1595, 파리 루브르박물관.

카라바조, ‘점쟁이(The Fortune Teller)’, c.1595, 파리 루브르박물관.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가만 해도 수십 개의 박스형 부스가 줄지어 형성되어 있다. 청년층과 외국인 관광객의 접근성이 매우 높아 일종의 ‘타로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예의상 한두 개씩은 남아 있던 서점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주변 골목들도 마찬가지다. 소형 타로와 사주 부스가 다수 입점해 있어 2030세대의 데이트 코스로 활발히 소비된다.

타로·사주 집이 카페만큼이나 많아지긴 관광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주 한옥 마을, 경주 황리단길에는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식당이 밀집한 거리 곳곳에 타로 및 사주 집들이 대거 입점해 있다. ‘타로’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볼 때면 옛날의 ‘점집’을 떠올리게 된다. 한자로 점(占)이라고 쓴 때 묻은 깃발 하나가 꽂혀 있고, 그 오두막 기와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한 번쯤 주변을 둘러보고 얼른 들어갔다 나오던 그 원조 점집 말이다. 요즘은 어떤가?

이제 타로는 당당하고 시크한 하나의 유흥 문화가 된 듯하다. 마치 길거리 편의점처럼 오픈되어 있고 고객 역시 쭈뼛거리거나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다. 용하게 잘 맞춘다고 알려진 곳은 줄을 서야 할 정도. 30년간 같은 대학으로 출·퇴근해 온 나로서는 이 바뀌어버린 풍경들이 민망하고 쓸쓸하다. 20, 30대의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꿈과 좌표에 자신 없어 5000원, 혹은 1만원을 내고 낯선 사람 앞에서 자신의 미래를 물어야 할 만큼 불안해진 현실이 슬프게 다가온다.

20대는 소위 청운의 꿈을 꾸며 무지갯빛 미래 비전을 그리는 시절이다. 조금쯤 불안해도 자신의 계획을 썼다가 지우며 한발 한 발 내딛는 시기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청년의 얼굴에서 그런 모험과 기백을 보기 어렵다. 그 대신 짙게 드리운 우수(憂愁)의 그림자가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서 꿈을 박탈하고 무지갯빛 미래를 빼앗아 버린 것인가. 그리고 무지갯빛 대신 잿빛을 쥐여준 것일까. 그래서 기댈 곳 없고 불안한 자신의 앞날을 유흥이 가미된 5000원 짜리 거래를 통해 묻게 만든 것일까.

이런 상황 속에서 왜 결혼하지 않느냐,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뉘라서 그들을 몰아세울 수 있겠는가. 결혼을 한다 해도 서울 같은 곳에서 자기 집을 마련하려면 둘이서 열심히 벌고 저축하더라도 잘해야 회갑 무렵에야 겨우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온단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폐(廢)버스’나 ‘청년 빌라’는 그들에게 대안이 아닌 모독이고 능멸이다. 청년들이 ‘빚투’하여 뛰어드는 레버리지는 그들에게는 기성세대가 놓은 또 하나의 덫이고 함정이다. 걸려든 순간 미래는커녕 당장 오늘의 삶이 망가져 버리는 것이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점쟁이’는 손바닥 점을 보는 집시 여인에게 운명을 묻는 청년을 그린 작품이다. 17세기 전 유럽 화단에 유행된 집시 점쟁이 도상의 시초가 된 그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귀족 차림의 순진한 청년이 집시 여인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사이, 여인은 손금을 만지는 척하며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답을 고대하는 그림 속 청년의 얼굴에서 타로집을 기웃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보인다. 반지를 빼가듯 꿈을 앗아버린 것이다. 누가 이들의 손을 다시 잡아 일으켜 희망의 사다리 쪽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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