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선왕(先王)을 헐뜯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라. 그 자가 저술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은 모두 거두어 불사르고, 그 도당들을 일망타진하라.”(연산군 4년 7월)
1498년에 발발한 무오사화(戊午史禍)로 6년 전에 죽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무덤에서 나와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유생 시절에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의제를 위한 제문)이 제자 김일손의 사초(史草)로 인해 되살아난 것이다. 실록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 외에 전해 들은 이야기나 사관(史官) 개인의 논평을 싣기도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논조의 김일손 사초가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자신의 충분(忠憤)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승의 글을 끌어온 것이라 한다.
유생 때 쓴 ‘조의제문’ 훈구파 조작
무오사화 대역죄인 몰려 부관참시
성장하는 사림의 싹 뽑힌 듯 했으나
결국 도학자의 정치 참여 시대 열려
세조에 맞서 잡학 거부할 만큼 강직
역적 아비 둔 13살 아들은 유뱃길에
경남 밀양에 있는 김종직 신도비. [사진 국가유산청]
유자광 조작에 넘어간 연산군 격분 김종직 사후에 편찬된 『점필재집』에 ‘조의제문’이 실려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의제와 항우를 단종과 세조라고 보지 않았다. 성종도 하나의 사평(史評)으로 보았을 뿐인 글을 주석을 달고 글귀마다 풀이하여 연산군을 격분시킨 자가 있었는데, 바로 유자광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증조부 세조를 농락한 김종직을 가만둘 수 없었다.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한 것은 실록의 초고인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오년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은 50여 명인데, 김일손 등 사형 6명을 비롯하여 유배 아니면 파직이었다. 대부분 김종직 제자 그룹의 사림들이었다.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
보기는 쉬워도 그려내기는 어렵지
세인(世人)들의 눈에 들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붉은 연지로 모란이나 그릴 것을.
1446년(세종 28) 16세의 김종직이 진사시에 낙방하여 낙향하는 길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읊은 시다. 시의 뜻은 김종직 자신은 고고함과 청아함을 추구하지만 시관(試官)은 울긋불긋한 모란과 같은 화려한 글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과 절연할 뜻은 없는 것 같다. 김종직의 이후 삶이 궁금해진다.
당시는 문장(사장) 능력이 과거 급제의 관건인 시대였다. 문장으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던 김종직은 부친 김숙자(金叔滋)의 권고로 이학(理學·도학)에 몰두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이후 그는 도학(道學)과 시학(詩學)을 겸비한 유교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아버지 김숙자는 여말선초의 유학자 길재의 문인이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며 금오산 기슭에 몸을 숨긴 길재를 선산에 살던 김숙자가 찾아간 것이다. 정몽주를 이은 길재의 절의 정신과 그 학문을 따르고자 선비들이 몰려드는데 김숙자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21세의 김종직은 현령 조계문의 딸 창녕조씨와 혼인을 한다. 그는 김숙자와 박홍신의 딸 박씨 사이 3남 2녀의 막내로 밀양에서 태어났다. 선산의 김숙자는 당시의 풍습대로 혼인과 함께 거주지를 밀양으로 옮겨 간다. 아들 김종직의 고향이 밀양이 된 이유이다.
김종직 초상. 사림파의 정계 진출 선구자로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결국 조선의 정치와 학문을 이끌게 된다. [사진 위키피디아]
요직 못 차지한 아버지 김숙자 과거를 통해 관료계에 진출한 김숙자는 능력과 행실이 탁월함에도 요직의 문 앞까지 갔다가 거절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급제 후 바로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것이다. 1423년(세종)에 동궁 교육을 담당한 시강(侍講)에 임명되자 ‘조강지처’가 또 발목을 잡았다.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펼쳐놓는 고발자들과의 대변(對辨)을 부끄럽게 여긴 김숙자는 마침내 파직되고 고신(告身·임명장)을 빼앗긴다. 참 억울했을 아버지를 위해 김종직은 『이존록(彝尊錄)』을 저술하여 가족 및 혼인 관련 사실을 밝혀놓았다. 이에 의하면 아버지 김숙자(1389~1456)는 30세에 한씨와 이혼하였고 31세에 문과급제했으며, 32세에 박씨와 재혼하였다.
김숙자가 한변(韓變)의 딸 한씨와 혼인을 한 것은 그의 아버지 김관(金琯)의 뜻이었다. 김종직의 조부 김관은 공녀 차출에서 구해줄 요량으로 엉겁결에 아들 김숙자의 혼인을 약속한다. 당시 김숙자는 관례를 행하기 전의 나이, 13~14세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돈 집안의 격이나 며느리의 성품이 문제 되면서 김관은 며느리 출처(出妻·이혼)를 단행한 것이다. 출처의 원인은 ‘불순부모(不順父母)’였다. 이혼 사유는 김숙자 측의 주장이기에 가족 내부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급제하고 이혼한 게 아니고 이혼하고 급제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김숙자가 아들 김종직의 혼사를 정해놓고 혼례를 진행하지 않자 주변에서 부유한 쪽으로 혼처를 바꾸는 게 어떠냐고 하자 김숙자가 거의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는 점, 자녀들의 혼사에 무엇보다 집안의 품격과 가풍을 강조한 것에서 짐작되는 바는 있다.
중앙에서 왕과 직접 대면하여 자신의 재덕(才德)을 풀어놓을 기회를 갖지 못한 김숙자는 경상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수행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근무지마다 따라 다니는 세 아들의 학습을 아침저녁으로 지도하는 스승이기도 했다. “공부는 순서를 뛰어넘어서는 안된다!” 김종직이 마음에 새긴 아버지의 공부법이었다. 김종직은 또 ‘글을 읽을 때는 그 뜻을 생각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평생 쓸 자호(自號)에 담았다. 김종직의 호 점필재(佔畢齋)는 ‘글 뜻도 모른 채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일종의 겸사(謙辭)다.
1459년(세조 5), 29세에 급제한 김종직은 불과 두 달 만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일원으로 선발되었고 그 3년이 지나 임금 앞에서 경전을 강의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런데 잡학에 속한 천문·지리·의약 등의 칠학(七學)을 문신에게 익히도록 하라는 세조의 명에 김종직이 반기를 들었다. 잡학은 그 분야 전문가에게 맡기자는 김종직과 잡학의 수준을 높이려면 문신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세조가 대립한 것이다.(세조 10년 8월 6일) 김종직은 도학의 근본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세조는 학문의 개방성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로 인해 사헌부 감찰 김종직은 파직되었다.
자리를 잃은 김종직은 고향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등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향에서 어머니 박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너는 고향에 연연하지 말거라. 어찌하여 그릇된 계책을 가지어, 태평한 때에 공연히 숨어 사느냐. 진실로 삼부(三釜)의 녹봉이면 너는 나의 증삼(曾參)이다.”(‘동무음(東武吟)’, 『역주점필재집』 1) 적은 녹봉을 받더라도 일을 하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증삼(효로 이름난 공자의 제자)과 같은 효자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54세의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오르자 제자들은 훈구파와 적극적으로 싸워 조정을 바로잡아 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쳤는지 제자 김굉필이 시로써 스승의 어정쩡한 처신을 비판한다. 김종직의 답시는 이러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공경대부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내가 어찌 임금을 보필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대 같은 후학(後學)들은 나의 허물과 어리석음을 조롱하지만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는 않는다네.
한편 율곡은 절의를 중시한 김종직의 일화를 소개했다.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김종직이 “성삼문은 충신입니다”라고 하자 성종이 놀라며 낯빛이 변했다. 이어서 김종직이 “불행히 변고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석담일기』 하).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죽었을 때 초가 한 칸 없어 도학자의 정신을 견지하며 성종의 문치(文治)를 이끌던 김종직은 62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예견한 듯 고향으로 돌아가 쉬고 있던 그에게 임금은 가난함을 걱정하며 밀양 백산의 외거 노비 15명과 동래 온정의 논 일곱 섬지기를 하사하였다. 그의 졸기에는 한양에 출입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자기 집으로 초가 한 칸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에게는 장례를 주관할 직계 가족이 없었다. 아내 조씨는 10년 전에 세상을 떴고 살았다면 23세가 되었을 죽은 아들 목아를 비롯 연이어 자식들을 잃는 비운을 겪었다. 재혼해서 얻은 아들 일곱 살 숭년(崇年)은 어려서 상주가 될 수 없었다. 6년 후 무오년 13살의 숭년은 ‘대역죄인’이 된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로, 어리다는 이유로 죽음은 면하여 합천군에 유배되었다.
김종직은 도학자의 경세 참여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한국유학의 전환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즉 그의 출사는 이후의 사림들이 관계(官界)로 진출하는 선구가 되었고 성종대에 문치(文治)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무오사화는 성장하는 사림파를 제거하려는 훈구세력의 조작사건으로, 사림의 싹이 뽑힌 듯했으나 김종직이 뿌린 씨앗은 곳곳에서 자라나며 조선의 정치와 학문을 이끌었다. 두 번 죽음으로써 김종직은 시대의 스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