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2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날 국회에 따르면 조 대법원장은 오는 31일 국회 법사위 현안질의에 “사법부 독립에 반한다”며 불출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연합뉴스]
청와대가 28일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서면 제청한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다른 후보자를 다시 제청하라고 요구하면서 대법관 인선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2차 충돌로 치달았다. 헌법상 대법원장 제청-대통령 임명-국회 동의만 규정됐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반려가 위헌이란 주장도 법조계와 야권에서 나온다. 당장 국민의힘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조 대법원장은 “자세한 내용은 검토 중”이라며 다음 주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손 후보자 제청은 절차적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며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후보자를 재제청할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조 대법원장이 지난 18일 대면 제청 관례와 달리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에 손 후보자를 서면 제청한 지 열흘 만이다. 앞서 1월 대법관후보추천위가 4명(김민기·손봉기·윤성식·박순영)의 법관을 추천했고 관례에 따라 대법원과 청와대가 조율했으나 타협점을 찾진 못했다. 대통령이 사법부의 임명 제청을 거부한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8년 1월 법관회의가 제청한 김동현 전 대법관의 대법원장 임명을 거부한 이후 약 69년만이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아래에서는 처음이다.
청와대는 제청 과정의 절차적 문제와 공정성 훼손,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 부족 등을 반려 이유로 들었다. 강 수석대변인은 “제청권은 임명권이 올바르게 행사되도록 뒷받침하는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또 법원행정처가 후보자 4명에게 추천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는 방안에 대한 의사를 물은 걸 두고 “이미 정당하게 추천된 후보자들을 제청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후보자 개인에게 타진한 것은 인사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손 후보자에 대한 이번 제청이 대법원 구성 다양화라는 국민적 요청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손 후보자가 남성이어서 현재 남성 11명, 여성 3명인 대법관의 성비가 개선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강 수석대변인은 그러면서 “법원조직법이 정한 대로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 결과를 존중해 제청권이 공정하게 행사될 때 비로소 제청에서 임명에 이르는 전 과정이 헌법상 국민주권 원리와 적법 절차 원칙에 부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영교 법사위원장은 “나머지 (3명) 후보자를 대상으로 충분히 협의하고 합의해 빠른 대법관 재제청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대통령의 제청 반려와 여권의 주장은 곧 논란을 낳았다. 새 추천위를 구성해선 안 되고 남성은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어서다.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대통령의 임명권을 ‘뒷받침하는 권한’으로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청와대의 이 같은 입장이 청와대가 김민기 서울고법 판사를 1순위로 고려한다고 알려진 가운데 나온 것이라 더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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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판사냐” 질문에…청와대 “확인되지 않은 사항”
조 대법원장은 김 판사의 배우자가 현 정부에서 임명된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난색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동안 청와대가 선호해 온 것으로 알려진 김민기 판사를 염두에 둔 것이냐’는 질문에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여성 후보인 박순영 판사를 제청할 경우 수용할지를 묻는 질문에도 “브리핑 내용으로 갈음하겠다”고만 했다.
대법원은 대응 방안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조 대법원장이 청와대 요구대로 기존 후보 3명 가운데 한 명을 다시 제청할지, 아니면 추천위를 새로 구성해 후보 추천 절차를 원점에서 다시 밟을지가 쟁점이다. 법원조직법은 추천위가 후보 추천을 마치면 해산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2년 7월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했을 당시 대법원이 2주 만에 새 추천위를 구성하고 약 한 달 반 뒤 후보자 4명을 새로 추천한 전례도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청와대가 수용하기 어렵고, 기존 후보에서 추천은 조 대법원장이 수용하기 어렵다. 양측의 갈등이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구조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오후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다음 주 중 공식 입장을 내겠다”고 말했다.
법조계와 야권을 중심으로 “위헌”이란 반발도 거세게 일었다. 청와대의 논리대로 대통령이 기존 후보군 가운데 원하는 후보자가 제청될 때까지 제청을 거부할 수 있다면 ‘제청→거부→재제청’이 반복돼 결과적으로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한 수도권 법관은 “민주당 주장대로라면 헌법에 규정된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있으나 마나 하게 된다”며 “반헌법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허영 전 경희대 법전원 석좌교수도 최근 언론에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을 대법원장이 대법관으로 제청해야 한다면 대통령이 사실상 대법관을 선정하는 것이어서 명백한 위헌”이라고 썼다.
실제 헌법재판소에서 유사한 판단을 한 적이 있다. 지난해 3월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당시 국회에서 선출한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과 관련, “대통령은 임의로 (재판관) 임명을 거부하거나 선별하여 임명할 수 없고 헌법·법률적 하자가 있는 경우에 임명을 보류하고 재선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야권은 청와대의 재제청 요구를 강하게 규탄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임기 중 22명의 대법관을 모두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기 위한 사법부 길들이기의 신호탄”이라고 비판했다. 조응천 전 의원은 “재제청 요구는 임기 내 대법관들을 대통령 의중에 맞는 인물들로 채우려는 ‘코트 패킹(court packing)’의 사전 작업”이라며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 해소가 대한민국 제1의 국정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편 다음 달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으로 제청된 김성수 후보자(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은 이날 국회에 제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