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일·조영진 등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연극 ‘운명의 힘’. [사진 극단 제비꽃]
“네 엄만 붉은 동백처럼 화려했지만 여자만의 향기는 없었어.”
30년 넘게 한 여자와 살고 있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친구의 사별한 아내를 평생 연모해 온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에게. 극단 제비꽃이 1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운명의 힘’(9월 6일까지 씨어터쿰)은 가족 사랑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욕망의 응어리를 건드리는 무대다. 동아연극상 등을 수상한 최창근 작·연출의 연극 인생 25주년을 기념해 주연배우 강신일을 비롯해 문인 등 240여명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댔다.
셰익스피어나 그리스비극처럼 웅장한 무대도 있고 체호프나 입센처럼 묵직한 리얼리즘 연극도 있지만, 사실 연극만의 재미란 지금 내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일상에 확대경을 대는 소소한 창작극에서 느끼곤 한다. 100석 남짓 밀도높은 소극장에 세트라곤 모네의 ‘수련’을 닮은 안개 낀 저수지 영상과 의자 몇 개가 전부. 모든 배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지질학 교수 한운사의 정년퇴임일이자 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들. 화기애애하게 제사를 시작하지만, 슬그머니 시작된 입씨름 열전에 긴 세월 가슴에 품은 각자의 속내가 고름처럼 터져 나온다. 가족이란, 결혼이란 무엇인가. 과연 ‘운명의 힘’이 가족을 붙들고 있는 걸까.
운사와 세 딸에겐 두 개의 빈자리가 있다. 운사의 외도 탓에 우울증을 앓다 죽은 아내와 군대에서 의문사한 장남. 죽음을 ‘선택’한 둘의 빈자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은 ‘무늬만 가족’이다.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장녀 정임은 엄마 역할을 하느라 집안에 갇혔고, 시인이 되려던 아들을 법대에 보냈던 운사는 딸들이 자신을 왕따시킨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늙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조심스런 관계를 전격 조명한 것도 새롭다. 팬데믹을 배경으로 마스크가 소재로 등장하는데, “집에서는 마스크 안 써도 되지?”라는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실은 집에서도 가면을 쓰고 가족을 연기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마스크를 벗은 민낯엔 갈등과 우울로 얼룩진 가족의 역사가 적나라하다.
뜻밖의 클라이맥스는 가족의 비밀이 아니라 운사의 친구인 종교학자 김인성과 그의 아들 간 충돌로부터. “내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운명일까” 묻는 운사에게 “운명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도 있다”던 낭만주의자 인성이지만, 자신의 비밀을 까발리는 아들에게 “네 엄마에게 한 번도 안식을 느낀 적 없지만 아버지 역할은 다했다. 나도 누군가 남몰래 좋아할 권리는 있다”는 외침이 짠하다. 가족이라는 운명 앞에 낭만과 자유의지의 몫은 그 정도일까.
태풍이 지나가고, 가족은 다시 가면을 장착한다. 여행을 떠나는 정임에게 운사는 “실은 네 엄마를 깊이 사랑했다”면서 “다시 돌아올거냐” 묻고, 정임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으니” 돌아오겠다고 한다. 극중 인용되는 토마스 울프의 말처럼 인간은 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라, 오늘도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다. 가족을 붙드는 것도 운명이 아니라 사랑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