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열풍의 주역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지난 8월4일 내한 당시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사진 연합뉴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가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 대박을 기록 중입니다. 고전을 원작으로 한 사변적인 진지함이 한국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란 일부의 예상과는 달리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고, 이제 1000만 관객 동원이 가능할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영화 ‘오디세이’의 열풍과 함께 서점가에서도 다양한 ‘오디세이’ 관련서들이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는데요, 특히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새로 번역한 ‘오뒷세이아’는 지난 8월 4일 발매 이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해풍과 청동 냄새가 나는 번역’이라는 호평과 함께 판매량 5만 부를 넘어섰습니다. 이 또한 고전 교양서로는 보기 드문 성적이죠.
이 분위기에 맞춘 [송원섭의 와칭] 특집입니다. 제 SNS 계정을 통해 ‘오디세이’ 관객들에게 원작 번역자이자 신화 전문가인 김헌 교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모집했고, 그중 여섯가지 질문에 대한 김 교수의 답을 오늘 기사로 공개합니다. 질문과 답변의 길이는 살짝 조정했습니다.
김헌 서울대 교수가 새로 번역한 호메로스 원작 '오뒷세이아'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와 함께 서점가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사진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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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 감히 여신의 목을 치다니?
Q : 영화 ‘오디세이’의 트로이 성 전투 장면에서, 학살을 저지르던 그리스군이 아테네 여신상의 목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앞에선 아테네 여신에 대해 ‘양국 공통의 신’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감히 그리스인들이 여신의 목을 쳐도 되는 것일까?
A : 아테네는 황금 사과-파리스의 심판 사건 이후 트로이아에게 적대적이고 그리스군에게 호의적이다. 특히 오뒷세우스에겐 거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따라서 영화에서처럼 그리스군이 아테네의 신상을 훼손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놀란의 창작이 아니고,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의 근거에 따른 것이다. 트로이아 목마 작전 당시, 그리스인들은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건한 태도를 잃고 야만적이고 오만(hybris)을 드러낸다. 특히 작은 아이아스는 아테나의 신전으로 피신한 트로이아의 공주 카산드라를 쫓아가 그녀를 강제로 끌어낸다. 다른 원전에 따르면 아이아스는 카산드라를 겁탈하기도 하고, 신상을 무너뜨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상적인 그리스인으로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놀란은 이 장면을 통해 전쟁의 광기와 승리에 대한 오만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전쟁의 광기와 인간의 오만을 효과적으로 묘사한 '오디세이'의 트로이 성내 전투 장면.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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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 vs 행동, 오뒷세우스의 두 얼굴
Q : 원작에는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키클롭스)가 사는 섬에서 괴물이 이름을 묻자 오뒷세우스가 ‘아무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 대신 굳이 화살을 쏘아 폴리페모스를 화나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두 장면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A : ‘아무도 안’이라 말하고 복수에 성공한 후에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는 장면은 사실 원작 전체의 플롯을 응축하고 있다. 트로이아의 목마 작전을 기획한 전쟁의 영웅이었던 그가 외눈 거인에게 속수무책 당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죽음을 갚아주고 이름을 당당하게 내놓는 오뒷세우스의 존재론적 회복은 10년 동안 잊힌 존재로 떠돌다가 거지 노인의 넝마를 벗어던지고 이름을 밝히며 구혼자들을 제거하는 응징하는 후반부 전체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놀란은 그런 오뒷세우스가 아니라, 원하지 않는 전쟁에 말려들어 폭력으로 일그러진 존재가 자기 행위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에, 폴뤼페모스 장면에서도 오뒷세우스를 지략의 오뒷세우스가 아니라 ‘일단 행동하고 보는’ 폭력적인 캐릭터로 설정했던 것 같다.
오뒷세우스가 맞닥뜨린 거대한 소용돌이 칼리브디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공식 예고편 캡처
혹시 원작에 있지만 영화에선 빠져서 아쉬운 장면이 있을까?
A : 호메로스 원작에서 오뒷세우스에게 최대의 환대를 베풀었던 파이악스인들은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오뒷세우스를 고향으로 후송한 후에 귀향 도중 마중 나온 파이악스인들의 눈앞에서 돌덩이로 변한다. 이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내내 ‘환대’를 제우스의 법으로 강조해 온 놀란으로선 ‘오뒷세우스를 환대한 죄’로 벌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곤혹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 주장’에 맞지 않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라면, 놀란은 원작을 크게 훼손한 셈이다. 각색의 천재 놀란이 만약 이 부분을 영화에 넣었다면, 어떻게 해석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놀란을 '천재 각색자'로 칭찬하는 김헌 교수. 사진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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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우스의 다른 아들들도 있었나?
Q : 원작과 일치하는 장면 중에, 오뒷세우스가 굳이 자신의 귀는 막지 않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보려 하는 장면이 있다. 이 호기심이 오뒷세우스의 본질이라면, 그의 긴 여정도 혹시 미지를 탐험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것은 아닐까?
A : 호기심이 오뒷세우스의 중요한 특질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욕구도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지나친 결과론적 해석이다. 그가 떠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갈 길목인 말레아 곶에서 뜻하지 않게 폭풍을 만났기 때문이고, 폴리페모스를 만나 눈을 빼앗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기 전부터 이미 방랑은 시작되어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욕구가 방황의 원인은 아니다.
Q :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이외의 신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키르케, 칼립소와 낳은 자식들 이야기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한 후일담도 전해지나?
A : 그 자손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승을 통해 많은 이름이 전해진다. 키르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텔레고노스인데, 기원전 6세기 경 에우감몬의 서사시 ‘텔레고니아’는 그 텔레고노스의 손에 오뒷세우스가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칼륍소와의 사이에서도 두 아들을 낳는데, 기원전 1세기 작가 휘기누스에 따르면 칼륍소는오뒷세우스가 떠난 뒤 그를 잊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고도 전해진다. 오뒷세우스에게 불멸을 권했던 것이 칼륍소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뒷세우스와 칼립소 이야기는 여러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1699년 프랑스의 작가 페를롱은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아 항해하다가 난파되어 칼륍소의 섬으로 갔다는 이야기로 소설을 썼다. 이 이야기에서 오뒷세우스는 이미 떠난 뒤였고, 칼륍소는 오뒷세우스를 닮은 텔레마코스에게 다시 연정을 품기도 한다.
페넬로페를 연기한 앤 해서웨이. 과연 우리 각자의 페넬로페는 누구일까. 사진 유니버설 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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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천만 돌파도 가능할까
Q : 영화 ‘오디세이’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까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대체 현대 한국인들은 이 영화의 어떤 면에 끌리는 것일까?
A : 단지 오뒷세우스의 신비롭고 놀라운 모험 이야기라면 이 정도의 반향은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에게도 돌아가야 할 이타카가 있는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오뒷세이아'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일(직장, 가사, 육아, 인간관계, 군 복무 등등)에 연루되어 그 일을 마치고 끝내 돌아가야 할 나의 자리, 그래서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맞서게 된다. 나를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내 삶에서 도대체 무엇인가? 나를 믿어주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내 인생의 페넬로페는 누구인가? 내가 페넬로페가 되어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지켜주어야 할 나의 오뒷세우스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으로 번역되는 순간, 나는 나의 ‘오뒷세이아’의 작가가 되고 놀란의 영화에 깊이 빠져들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 세계인에게, 특히 나를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원하지 않는 일에 연루되어 전쟁 같은 삶을 치열하게 살다가 나를 잃을 기회가 더 많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