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바다가 들린다, 폐교와 선박 창고에서…2026 부산비엔날레 개막

중앙일보

2026.08.30 01:0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2026 부산비엔날레가 열리는 영도구 옛 부산남고등학교 운동장에 헌옷을 이어 만든 알리아스카르 아바카스의 대형 설치 '주문'이 전시돼 있다. 송봉근 객원기자

2026 부산비엔날레가 열리는 영도구 옛 부산남고등학교 운동장에 헌옷을 이어 만든 알리아스카르 아바카스의 대형 설치 '주문'이 전시돼 있다. 송봉근 객원기자


폐교 운동장에 색색의 천이 마법사의 주문처럼 놓였다. 이란과 영국에서 활동하는 알리아스카르 아바카스는 지역 주민들과 모은 헌옷을 부산 영도구 옛 부산남고 운동장에서 함께 꿰맸다. 여기서 29일 대금 퍼포먼스가 열렸고, 관객들도 작품 위를 걸으며 몸으로 규모를 체험했다.

올초 학생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폐교에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2026 부산비엔날레가 '불협하는 합창'을 주제로 29일 개막, 65일의 여정을 시작했다. 22개국 46명(팀) 작가가 설치·사운드·퍼포먼스·영상·조각 등 다양한 매체로 부산이 품은 이동과 생존, 노동의 역사, 바다에 대한 기억을 풀어냈다. 70%가량이 부산비엔날레를 위해 새로 만든 신작이다.

발언하는 아말 칼라프(왼쪽), 에블린 사이먼스 2026 부산비엔날레 공동감독. 권근영 기자

발언하는 아말 칼라프(왼쪽), 에블린 사이먼스 2026 부산비엔날레 공동감독. 권근영 기자

전시를 기획한 아말 칼라프, 에블린 사이먼스 공동감독은 28일 “전쟁 등으로 혼란하고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술가들이 지휘자 없는 합창, 서로 다른 목소리로 길잡이가 될 것”이라며 “항구 도시 부산은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와 여객선 소리, 도시의 소음, 강렬한 노동 운동의 역사와 민중가요까지 다양한 메아리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사이먼스 공동감독은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부산의 크레인에서 고공시위를 벌인 김진숙 활동가부터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촛불 시위와 응원봉 시위까지 체제에 맞서 목소리를 낸 한국인의 살아 숨 쉬는 이야기가 이번 비엔날레의 기준점이 됐다”고 덧붙였다.

옛 부산남고 진로실에 설치한 본인의 작품 '토착성의 공명'에 선 몽골의 얀찬호롤 에르데네바야르. 권근영 기자

옛 부산남고 진로실에 설치한 본인의 작품 '토착성의 공명'에 선 몽골의 얀찬호롤 에르데네바야르. 권근영 기자

이번 비엔날레는 낙동강 하구의 퇴적섬인 을숙도에 자리 잡은 부산현대미술관을 주전시장으로 영도구의 옛 부산남고와 스페이스 원지 세 곳에서 열린다. 옛 부산남고는 1974년부터 올해 초까지 고교 교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산남고가 올 2월 강서구 신축 교사로 이전을 완료하며 폐교로 남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교 건물에서 권위주의식 교육을 벗어나 어떻게 세대 간의 가르침이 전해질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작품이 설치됐다.

박현성이 급식실에 설치한 본인의 작품 '우리는 차가운 물속에 있는 것처럼 떨고 있었지'를 설명하고 있다. 권근영 기자

박현성이 급식실에 설치한 본인의 작품 '우리는 차가운 물속에 있는 것처럼 떨고 있었지'를 설명하고 있다. 권근영 기자


몽골 출신의 얀찬호롤 에르데네바야르는 진로실 칠판에 거울 조각과 동물의 뿔을 붙였고, 울란바토르의 야외 시장에서 가져온 의자 15개를 늘어놓았다. 텅 빈 교실엔 그가 시장에서 녹음해 온 웅성거림이 울렸다. 구 소련의 잔재가 여전한 몽골 교육의 현실에서 지식 전승의 다른 방식은 없을지 질문한다. 부산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박현성은 급식실에 워터펌프와 호스로 바닷속 생명체를 닮은 구조물을 설치했다.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박현성은 “학생과 교직원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급식실을 낯선 바다 풍경처럼 바꿔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과거 선박창고였던 영도구 스페이스 원지에 전시중인 필리핀의 선원 출신 화가 조아르 송쿠야의 '선원직 프로젝트'. 권근영 기자

과거 선박창고였던 영도구 스페이스 원지에 전시중인 필리핀의 선원 출신 화가 조아르 송쿠야의 '선원직 프로젝트'. 권근영 기자

과거 선박 장비를 임대 보관하던 창고였던 영도의 스페이스 원지에는 바다·노동·생존과 관련된 작품이 설치됐다. 필리핀 출신의 조아르 송쿠야는 선원 시절 기록하듯 그린 100여 점의 드로잉을 전시했다. 전시 장소의 역사와 공명하며 바다와 항구, 사람들의 풍경을 연결한 이 작품 앞에서 그는 “선원으로 왔던 부산에 이번에는 예술가로 왔다”며 눈물지었다. 그의 작품 일부는 부산교통공사와 협업, 교통카드로도 제작돼 시민들의 손 안에서 또 다른 이동을 시작한다.

벨기에의 브라힘 탈은 19대의 동작 감지 스피커를 놓았다. 합창단원들의 키에 맞춰 높이를 달리한 스피커에서는 바다가 되고픈 열망의 목소리가 따로 또 같이 울리며 전시장 밖 바다 풍경과 조응한다. 그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류성실의 '만 가지 꿈'. 권근영 기자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류성실의 '만 가지 꿈'. 권근영 기자

부산현대미술관에는 류성실의 ‘만 가지 꿈’이 설치됐다. 리프트 위에 오른 교복 차림의 마네킹 12대가 입에서는 금빛 술을 혀처럼 흔들고, 안광을 번쩍이며 15분 길이 합창을 노래한다. 노래 가사에는 세계를 일주하고 금의환향해야 하는 아이, 95세에도 원대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해골, 500년째 완수되지 않은 과업을 짊어진 소녀의 이야기가 담겼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에서 사람이 국가의 가능성을 대신해야 한다는 집단적 열망이 대중매체와 사회적 기대를 통해 개인에게 스며든 현실을 비틀었다.

팔레스타인 출신 야잔 칼릴리의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처럼 지닌다'는 시구가 새겨진 39종의 모자다. 관객들이 구입해 쓸 수 있다. 권근영 기자

팔레스타인 출신 야잔 칼릴리의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처럼 지닌다'는 시구가 새겨진 39종의 모자다. 관객들이 구입해 쓸 수 있다. 권근영 기자

팔레스타인의 야잔 칼릴리는 시 구절을 새긴 39가지 캡모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처럼 지닌다’를 전시장에서 판매했다. 조각난 문장은 모자를 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가까이 설 때만 잠시 이어진다. 모자 판매 수익은 팔레스타인을 돕는 일에 쓰인다. SF 작가 어슐러 르 귄이 창작 전에 그리는 지도 드로잉을 이용한 예술가 그룹 5D의 영상 설치 ‘축제’도 출품됐다.

부산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임민욱의 ‘노래하는 은자(隱者)’. 부산 민중가요 저장소 소장 음반 재킷을 천에 인쇄하고 색을 입힌 작품이다. 바로 밑에 민중가요 음원을 들을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됐다. 권근영 기자

부산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임민욱의 ‘노래하는 은자(隱者)’. 부산 민중가요 저장소 소장 음반 재킷을 천에 인쇄하고 색을 입힌 작품이다. 바로 밑에 민중가요 음원을 들을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됐다. 권근영 기자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64만명, 역대 최다였다.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이준 집행위원장은 “감독 공모에 지원한 70여팀 중 명망가보다는 부산에 맞는 신선한 개념을 제시하는 이들을 선정, 비엔날레가 문화엔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11월 1일까지 열리는 전시 기간 중 전시장 세 곳을 잇는 무료 셔틀 버스를 운행한다. 스페이스 원지와 옛 부산남고 전시장은 무료, 부산현대미술관은 성인 1만6000원.




권근영([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