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에 기념비적인 순간이 탄생했다. 시속 160㎞를 던지는 국내 투수 두 명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선발 맞대결했다. 1999년 동갑내기인 곽빈(두산 베어스)과 안우진(키움 히어로즈) 얘기다.
곽빈과 안우진은 지난 29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차례로 선발 등판해 나란히 전광판에 ‘160’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찍었다. 향후 이들이 은퇴할 때까지 이어질, 역사적인 라이벌전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둘은 고교 시절부터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를 다투던 라이벌이자 친구다. 배명고를 졸업한 곽빈과 휘문고를 나온 안우진은 2018년 각각 두산과 넥센(현 키움)의 1차 지명을 받고 프로에 발을 내디뎠다. 그 후 부상과 재활 등으로 성장 그래프가 엇갈리다 이날 입단 8년 여 만에 처음으로 같은 마운드에서 만났다.
먼저 마운드에 오른 곽빈이 ‘160’의 문을 열었다. 그는 1회초 키움 4번 타자 케스턴 히우라를 상대로 시속 160.3㎞의 강속구를 던졌다. 종전 개인 최고 기록(시속 159.1㎞)을 넘어선, 데뷔 후 최고 구속이다. 안우진은 1회말 곧바로 응수했다. 두산 3번 타자 박준순 타석에서 시속 159.9㎞짜리 직구를 뿌렸다. 반올림으로 표기된 160이 또 한 번 전광판에 찍히자, 잠실의 야구팬들은 “이게 KBO리그 경기 맞느냐”며 탄성을 쏟아냈다.
직구 평균 시속은 156㎞(35개)의 안우진이 155㎞(49개)의 곽빈에 앞섰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곽빈의 완승으로 끝났다. 곽빈은 6이닝을 5피안타 8탈삼진 2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시즌 11승(5패)째를 수확했다. 평균자책점(2.36)과 탈삼진(169개) 1위 자리도 공고하게 지켰다. 안우진은 5이닝 동안 안타 7개(홈런 1개)와 볼넷 3개를 내주고 5실점 했다. 5회말 2사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다 안재석에게 역전 홈런을 맞고 갑자기 무너졌다.
곽빈은 “우진이와의 대결에서 뭉클함을 느꼈다. 둘 다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거쳤는데, 서로 건강하게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는 데 의미를 뒀다”며 “안우진은 (예전부터 늘 강조했듯) 나보다 한 수 위의 투수다. 내년 시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우진이는 지금과 다를 것”이라고 했다.
안우진. [뉴시스]
안우진은 곽빈보다 먼저 프로에서 꽃을 피웠다. 곽빈이 팔꿈치 수술과 긴 재활로 두문불출하는 사이, 안우진은 2022년 15승·평균자책점 2.11·224탈삼진의 괴물 같은 성적을 올려 KBO리그 최고 투수로 우뚝 섰다. 이후 안우진이 팔꿈치 수술과 군입대로 자리를 비운 2024년, 곽빈은 공동 다승왕(15승)에 오르며 기지개를 켰다. 올해는 리그 정상의 에이스로 발돋움해 안우진 이후 4년 만의 국내 투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눈앞에 뒀다.
엄밀히 말해 이날 둘의 맞대결은 ‘진검승부’가 아니다. 곽빈은 데뷔 후 최고 전성기를 열고 있지만, 안우진은 부상 후 복귀 첫 시즌이라 아직 100% 상태가 아니다. 진짜 대결은 더 큰 무대에서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곽빈은 2027시즌, 안우진은 2028시즌 이후 해외 진출 가능 자격을 얻는다. 둘 다 메이저리그(MLB)를 향한 꿈을 숨기지 않는다. 곽빈은 “다음 맞대결은 미국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빅리그도 벌써 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이날 잠실구장에 LA 다저스, 뉴욕 양키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 5개 구단 스카우트가 찾아와 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곽빈과 안우진이 펼칠 ‘세기의 대결’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