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2021년 『초(超)가치』라는 책을 썼다.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2008~2013)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 총재(2013~2020)를 마치고 정계 입문 전인 2021년에 쓴 책인데 한국어 번역본이 무려 800쪽에 달하는 벽돌책이다. 유엔 기후변화특사로 활동할 때 나온 책이어서인지 ‘선한 자본주의’에 대한 상찬으로 가득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책 일부는 금융계의 유능한 ‘인싸’가 아니라 (2011년의) 월가 점령 시위대가 쓴 것 같다”고 평했을 정도다.
‘선한 자본주의’ 주창하던 금융인
친환경론 벗어나 송유관 건설까지
미국과 관세전쟁, 동맹국 중 처음
골드만삭스에서 13년간 일해 월가의 논리를 꿰뚫고 있는 그는 시장의 세 가지 거짓말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렀다고 했다. 첫째 거짓말은 “이번에는 다를 거야(This time is different)”. 카니는 “영어에서 가장 값비싼 네 단어”가 이 문장이라고 했다. 둘째 거짓말은 “시장은 언제나 옳아”. 카니는 “시장은 경제학 교과서에서만 명확하고 확실하다”며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경제는 완벽하지 않다”고 썼다. 시장은 항상 옳다는 믿음 탓에 정책 당국자가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 셋째 거짓말은 “시장은 도덕적이야”. 카니는 시장에 넘쳐대는 각종 불법행위 사례를 댔다. 카니는 정책 입안자와 시장 참여자가 금융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주문에 홀리지 않으려면 오디세우스처럼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어야 한다고 했다. 세이렌의 노래 같은 금융의 달콤한 유혹에 저항하려면 “시장의 한계를 깨닫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책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면서 “신뢰는 올 때는 걸어서 오지만 갈 때는 페라리를 타고 간다”고 한 대목은 얼마 전 한국의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ETF)를 떠올리게 한다. 환율 안정만을 보고 무리하게 도입한 대책에 코스피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변동성 증시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피 증시에 개인투자자의 주식은 녹아내렸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정말 페라리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경제학자이자 금융인인 카니가 정치인이 된 데에는 트럼프의 도움(?)이 컸다. 트럼프 2기의 울퉁불퉁한 관세정책과 ‘미국의 51번째 주로 캐나다 합병’ 운운하는 트럼프의 막말로 인한 반트럼프 정서는 정치 새내기를 총리로 우뚝 서게 했다.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 연설은 전 세계 주목을 받았다. 카니는 “규칙 기반의 질서는 퇴색했고 강자는 할 수 있는 대로 행동하며 약자는 감내해야 할 것을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강대국이 아닌 국가들끼리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의 축을 이루는 ‘유연한 연합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카니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 세계를 ‘분열된 시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은 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포스포럼에서 드물게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카니의 중견국 연대론이 구심점 부재(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차관) 등의 이유로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뭘 해도 상상 이상의 트럼프를 지켜봐야 하는 세계인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사이다 발언’이었다.
지난 7월 마크 카니 총리는 앨버타 주지사와 함께 1100㎞가 넘는 대규모 송유관 건설을 발표했다. 카니는 자유당, 앨버타 주지사는 보수당으로 정치적 라이벌인데 웃으면서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미국으로만 송유관이 연결돼 판로가 묶여있는 한계에서 벗어나자는 계획에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의기투합했다. 환경 문제로 대규모 파이프라인 건설은 불가능할 것으로 봤는데 카니가 정치력을 발휘했다. 유엔 기후변화 특사를 지낸 친환경론자 카니가 송유관 건설에 나서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캐나다를 통합시킨 것도, 환경 규제에 유연해질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트럼프 효과였다.
캐나다가 미국의 동맹국 중에 처음으로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돌입했다. 트럼프가 관세를 50% 올리자 즉각적으로 200억 달러 규모의 보복관세를 9월 8일부터 매긴다고 발표했다.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의 경합주 수출품을 정밀하게 타깃으로 삼는 등 캐나다도 영리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다. ‘사이다 발언’에 이은 ‘사이다 관세 전쟁’이다. 경제 규모가 캐나다의 13배나 되는 미국과의 관세 전쟁이 무모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캐나다의 이익을 지키면서 균형점을 찾아 나갔으면 한다. 미국은 한국의 대미투자 1호 사업으로 유력한 텍사스 가스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갑자기 7조원 증액을 요구했다. 반도체 관세를 예고하며 한국 반도체 회사의 대미 투자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는 많은 동맹국과 함께 한국도 캐나다의 분투를 응원하며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