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마주하는 첫 예술, 그림책의 강렬한 색채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전시가 있어 시선을 모읍니다. 영국 그림책의 거장이자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은 환상적인 색채의 그림책 작가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 전시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진행 중이에요.
『사자와 생쥐』는 원색의 대비와 동물의 생명력을 강조한 화려한 패턴으로 활기를 불어넣었다. ⓒ Brian Wildsmith
영국 요크셔의 작은 탄광 마을에서 성장한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는 온통 회색빛이었던 유년의 풍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강렬한 색채에 대한 갈망과 상상력을 키웠습니다.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어린이가 마주하는 첫 예술은 결코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신념 아래, 시대의 유행이나 관습적인 문법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세계를 구축했어요. 탄광 마을의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도 자연의 넘치는 생명력을 동시에 꿈꾸었던 그는 이러한 극명한 대비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조형 언어로 승화시켰죠.
1962년 출간되어 그에게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안겨준『ABC』는 교육적인 목적이나 교훈을 앞세운 메시지가 중심을 이루던 당시의 어린이책 출판계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선보였다. ⓒBrian Wildsmith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1962년 데뷔작『ABC』로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후 약 80여 권의 작품을 발표하며 전 세계 37개국에서 출간, 누적 30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색은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라고 말한 그의 작업은 그림 자체가 이야기를 이끄는 새로운 그림책 형식을 제시하며 현대 그림책의 흐름과 후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죠. 특히 현대 그림책의 거장 앤서니 브라운은 그를 “색과 여백을 가장 독창적으로 사용한 작가”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1962년 출간되어 그에게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안겨준『ABC』는 교육적인 목적이나 교훈을 앞세운 메시지가 중심을 이루던 당시의 어린이책 출판계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선보였다. ⓒ Brian Wildsmith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ABC』를 비롯해 초기 드로잉, 흑백 스케치, 완성 원화 등 약 200여 점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와일드스미스 그림책 원화전’은 60여 년에 걸친 작품 세계를 연도별로 따라갑니다. 요크셔 시절을 다룬 첫 번째 섹션에선 반즐리 미술학교 시절 스케치들과 함께 신문에 실린 최초의 유료 삽화 작업을 선보이는데요. 한 소년이 그림과 회화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훗날 그의 삶을 이끌어 갈 예술가의 길로 첫발을 내딛던 순간들을 보여주죠. 그는 열여섯 살 무렵 자신이 창작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즐리 미술학교에 진학해 당시의 보수적인 미술 교육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적 시선을 키워 나갔습니다.
1961년 출간된『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선보인 대담하면서도 독창적인 색채 표현은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Brian Wildsmith
런던의 명문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졸업 후 생계를 위해 레터링과 캘리그라피를 독학하며 책 표지 작업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미술 교사로 일하고, 방과 후에는 스쿠터에 포트폴리오를 싣고 런던의 출판사들을 찾아다녔죠.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그를 전문 삽화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1961년 출간된『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선보인 대담하면서도 독창적인 색채 표현은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어요. 고향 요크셔를 떠나 런던에서 보낸 브라이언의 젊은 시절을 조명하는 두 번째 섹션에서는 영국 밖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 책 표지 작업과 흑백 삽화,『아라비안 나이트』의 원화 등을 소개하죠.
사냥꾼이 쏜 오리들을 몰래 보살피는 사냥개의 연민을 담은 그림책『바보 사냥꾼과 멋진 사냥개』는 이웃집 개가 작가의 아픈 반려견을 매일 찾아와 돌보던 실제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Brian Wildsmith
예술적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1960년대를 조명한 다음 섹션에선『ABC』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데요. 1962년 출간된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ABC』는 그림책의 가능성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 작품이었습니다. 교육적인 목적이나 교훈을 앞세운 메시지가 여전히 중심을 이루던 당시의 어린이책 출판계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 언어를 선보였죠. 동물들은 진홍빛·에메랄드빛·코발트빛으로 타올랐고 물감은 화면 위에 흩뿌려지고 흘러내리며 나직이 빛을 발했습니다. 색채와 질감, 화면 구성은 더 이상 글을 보조하는 요소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이루는 중요한 표현이 됐어요.
그는 색채로 언어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과 감정,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ABC』는 영국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 분야 최고의 영예인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받으며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를 국제 출판계의 가장 독창적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어요. 그는 1960년대 내내 놀라운 속도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그림책이 지닌 예술적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대표작으로는『사자와 생쥐』『바람과 해님』『토끼와 거북이』등 라 퐁텐 우화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 있는데요. 이를 통해 그의 독창적인 시각은 세계 곳곳의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
『정글 파티』화면 전반에 펼쳐진 대담한 색채와 동물들의 몸을 수놓은 다채로운 질감의 문양은 와일드스미스 특유의 풍부한 회화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 Brian Wildsmith
1971년,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카스텔라라스로 이주했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우울해진다”고 말할 만큼 빛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 더 풍요로운 빛을 찾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선택한 거죠. 이후 브라이언의 생애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잇달아 탄생했습니다. 동물은 언제나 그의 상상력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해 왔는데요.『올빼미와 딱따구리』『아기 숲오리』『정글 파티』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그는 놀라운 생명력과 개성을 지닌 동물 캐릭터들을 창조해 냈죠. 이 작품들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그에게 동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관찰을 통해 동물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지 익혔지만, 그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혼과 본질적인 특성이었죠.
병상에 누운 아이들을 위한 희망을 담은 작품『회전목마』는 아픈 소녀 로지가 오빠 톰에게 회전목마를 선물 받고 꿈속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다. ⓒBrian Wildsmith
그는 어린이들이 동물과 맺는 본능적인 유대감을 이해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섬세하게 탐구하곤 했습니다. 그의 동물들은 사람을 흉내 내는 익살스러운 캐릭터로 단순화되지 않으면서도 충성심과 호기심. 용기와 애정, 그리고 경이로움을 자연스럽게 품고 있어요. 그의 창작 활동은 출판의 영역을 넘어 더욱 확장되었고 1976년에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영화사가 처음으로 공동 제작한 역사적인 영화 ‘파랑새’의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했죠. 이 작품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인 폰다, 에바 가드너가 출연했습니다.
『노아 박사의 우주선』에서는 그림책에서 환경 문제가 좀처럼 다뤄지지 않던 시기에 생태와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 Brian Wildsmith
1980년대에 접어들 무렵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는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혁신적인 그림책 작가 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거나 익숙한 방식을 되풀이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며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관심은 점점 더 다양한 주제로 향했죠.『노아 박사의 우주선』(1980)에서는 그림책에서 환경 문제가 좀처럼 다뤄지지 않던 시기에 생태와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어요. 여행 또한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됐죠.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편집자 론 히피와 함께 뉴욕을 방문한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의 거리를 야생 곰이 누비는 상상을 바탕으로『나 진짜 곰이야』(1981)를 탄생시켰어요. 새로운 시각적 형식에 대한 실험도 이어갔습니다.『펠리컨』(1982)과『데이지』(1984) 같은 작품에서는 분할 페이지 형식을 도입했어요.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미지를 새롭게 조합하고 변형하며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러한 장치는 호기심과 발견의 즐거움, 그리고 능동적인 읽기의 경험을 이끌어냈습니다.
주인을 찾아 길을 떠난 작은 동물들의 시선으로 성탄의 서사를 그린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 마지막 그림책『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 Brian Wildsmith
다음 섹션에서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조명하죠. 그는 학생 시절부터 깊이 매료되어 온 회화와 건축을 거듭 찾아 나섰습니다.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 이탈리아 아시시의 조토 프레스코화 등의 영향들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그림책 연작을 선보였죠. 자신이 사랑했던 위대한 회화의 서사적 전통과 시각적 리듬, 건축 구조를 바탕으로 금빛 액자 형식의 화면 구성과 연극적인 무대 연출, 치밀하게 구성된 이야기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1990년대 성경을 주제로 작업하던 시기에 탄생한 노아의 방주 팝업북.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세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Brian Wildsmith
『부활절 이야기』(1993)를 시작으로『성 프란치스코』(1995),『요셉 이야기』(1997),『모세 이야기』 (1998),『예수님 이야기』(2000),『성모 마리아 이야기』(2002)를 차례로 발표했으며, 마침내 그의 마지막 그림책인『베들레헴으로 가는 길』(2003)에 이르렀습니다. 기법은 점점 더 정교해졌고, 드로잉은 더욱 치밀해졌어요. 그의 마지막 창작의 장은 유행이나 상업적 기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내밀한 작품 세계를 완성해 나간 것을 볼 수 있어요.
2003년, 일흔세 살이 된 그는 조용히 펜과 붓을 내려놓았습니다. 새로운 책을 만드는 일은 끝났을지라도, 그의 작품이 지닌 생명력은 결코 끝나지 않았죠. 그의 이미지는 출판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2011년 리버티 패브릭은『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 재미있는 이름, 놀라운 세상』의 삽화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였고, 이는 이후 한정판 나이키 운동화에도 적용됐죠. 2013년에는 삼성전자의 의뢰를 받아 ‘물 절약’ 캠페인에 참여하며 생애 마지막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9명과 함께한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기존 그림책의 다양한 이미지를 조화롭게 엮어내어 아름다운 캠페인 그림책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완성했죠. 이 작품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어요. 2016년 8월, 여든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안료와 색채, 프레스코 제작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그림책과 회화 작품 등 다양한 작업물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경이로움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건네죠.
전시는 작품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미디어아트, 설치 작품, 체험형 연극, 창의 워크숍, 그림책 구연동화 등 다양한 참여형 콘텐트를 함께 선보입니다. 그림책 속 장면을 재현한 포토존과 자유 독서 공간은 물론,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의 미디어아트와 김선혁 작가의 설치 작품을 통해 그림책 속 세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죠. 이번 기회에 대담한 색채와 회화적 표현으로 그림책의 미학을 새롭게 정의한 와일드스미스의 작품 세계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와일드스미스 그림책 원화전’
기간 10월 16(금)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입장 마감 오후 6시 15분)
관람료 성인 2만원, 청소년·어린이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