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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장으로 읽는 책] 고통은 공백의 요소가 있어서

중앙일보

2026.08.31 08:06 2026.08.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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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고통은-공백의 요소가 있어서-/ 기억해내지 못해/ 그 시작이 언제였는지- 또는 고통이 없었을 때가/ 있기는 있었는지-// 고통에게는 미래가 없지-오직 자신뿐-/ 그 무한이 담고 있는/ 과거는- 깨어 감지하지/ 새로운 주기의- 고통을.
-에밀리 디킨슨의 시 ‘고통은- 공백의 요소가 있어서-’

9월 첫날 아침, 시 한 편을 읽는다. 19세기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슨(사진)을 사로잡았던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고통에 빠지면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도 사라지며,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든다. 삶과 정신이 증발한 ‘공백(blank)’ 상태. 19~20세기 독일·영미권 시인 20여 명의 시를 모은 시선집 『이 삶은 충분한가』에서 읽었다.

디킨슨은 평생 고향집에 은둔하며 1800여 편의 시를 썼고, 사후에나 출판되며 현대 영미시·여성문학의 시초가 됐다. 여성을 옥죄는 가정에 갇혀 살았으나 가부장적 질서에 매몰되는 대신, 그를 ‘자기만의 방’으로 삼아 여성의 정체성과 분노, 내면을 솔직하게 그렸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그의 삶은 여러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올케가 된 친구 수잔 디킨슨과의 지적 교류가 유명하다. 그는 또 대시(-)나 파격적인 대문자 사용 등으로 시쓰기의 정형을 깼는데, 위의 시에서도 대시(-)는 시에 긴 호흡을 주며 고통이 불러오는 ‘공백’을 형상화하는 듯하다.

이처럼 묵직한 삶의 고통을 노래하는 한편,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 날아든 파리 한 마리가 종교적 엄숙주의를 비트는 시도 있다. ‘파리 윙윙대는 소리가 들렸네- 내가 죽던 때에-’라는 시다.

“파리 윙윙대는 소리가 들렸네- 내가 죽던 때에-/ (중략) 둘러싼 눈들은-눈물을 짜내 말라버렸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네/ 방 안에-왕의 강림을 목도할-최후의 순간이/ 닥치길-// (중략) 바로 그때/ 파리 한 마리가 끼어들었어-// 푸르스름하게- 흐릿하게- 비틀대는 윙 소리와 함께-/ 빛과- 나 사이에-/ 이내 창이 희미해졌고- 그러자/ 보기 위해 볼 수 없었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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