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보다 90조원 이상 늘어난 내년 예산안을 편성했다. 예산 800조원대 시대가 처음 열렸다. 반도체 중심의 최근 경기 회복세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성장과 양극화 완화로 이어지려면 과감한 재정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단기간에 이례적으로 급증한 세수가 자신감을 키웠다. 다만 정부가 2년 연속 확장 재정 기조를 공식화하며 나라 살림이 단기간에 너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늘어난 정부 지출이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
경기도 용인시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공사 현장. 연합뉴스
정부가 1일 국무회의를 열어 ‘2027년 예산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올해 본예산(727조9000억원) 대비 93조원(12.8%) 늘어난 820조9000억원이다. 역대 가장 높은 지출 증가율로 지난해 처음 700조원 시대를 연 뒤 단 1년 만에 앞자리를 바꿨다. 구조적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시점에 대규모 재정 투자를 통해 잠재성장률 반등을 끌어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일단 쓸 돈은 있다. 내년 총수입은 880조8000억원으로 올해 본예산(675조2000억원) 대비 205조6000억원(30.4%) 늘어난다. 국세 수입이 무려 194조2000억원이나 증가할 전망이다. 반도체 경기 호황에 따른 기업 실적 개선으로 법인세가 크게 늘었고, 소득세수도 동반 상승했다.
통상 정부가 짜는 예산안은 총지출이 총수입을 웃도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엔 총수입이 총지출보다 60조원가량 많은 형태다. 기대 이상의 세수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면이다. 이 덕에 관리재정수지는 올해 107조8000억원에서 내년 3조1000억원으로 확 줄어든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에서 국민연금 등 4대 보장성 기금 수지를 차감해 정부의 실질적인 재정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51.6%에서 48.3%로 개선될 전망이다. GDP 증가 규모가 채무 증가 규모보다 커서다.
정부는 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이례적 상황을 조율할 새 카드도 꺼냈다. 앞서 예고했던 미래대응기금이다. 최근 10년 내국세 추세선을 상회하는 추가 세수는 별도 기금으로 떼어내 관리하겠다는 구상이다. 내년 기준 미래대응기금의 수입 규모는 162조3000억원으로 잡혔다. 이 중 45조4000억원은 본예산에 포함해 청년 지원과 주요 성장동력 투자 등에 지출하고,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발행 물량을 축소하는 데 쓴다. 나머지 104조4000억원은 여유자금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100조원이 넘는 정부의 비상금이 생긴 셈이다. 올해분 추가세수까지 향후 적립하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일단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인공지능(AI) 전환기에 맞춰 전방위적 투자에 나선다. AI 모델 고도화를 위해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 장을 추가로 확보하고, 국민 누구나 활용하는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총 5조원을 투자한다. 반도체와 피지컬AI, 데이터센터(AIDC) 등 3대 메가프로젝트는 투자 속도를 끌어올리고, 전력·용수·산단 등 핵심 인프라 구축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또한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회계’를 신설해 초격차 생태계 조성에 착수한다.
차준홍 기자
미래 성장엔진 관련 예산도 올해 51조2000억원에서 내년 62조8000억원으로 22.7%나 늘려 잡았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핵융합·소형모듈원자로(SMR) 등 7대 국가전략 핵심기술 등을 육성하겠다”며 “재생에너지 보급 예산을 두 배로 증액하고, 햇빛소득마을·전기차 보조금을 확대하는 등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 대전환을 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점 지원 대상은 청년이다. 급격히 나빠진 고용 상황과 소득 정체를 고려한 대응이다. 우선 청년미래적금의 소득요건을 폐지해 대상을 모든 청년으로 확대하고 혼인·출산·양육 3대 패키지를 도입해 아동수당 등의 지원 규모를 대폭 확대한다. AI·첨단산업 인재양성 부트캠프 지원 인원을 2배로 확대하고, 현장 경험을 학점으로 인정하는 인턴 학기를 통해 대학생 6만 명에게 졸업 전 취업 경력을 제공할 계획이다.
12대 분야별로는 일반·지방행정 예산이 가장 많이 늘었다. 121조4000억원에서 내년 149조원으로 27조6000억원 증가했다. 이어 보건·복지·고용 분야 예산도 올해보다 24조6000억원 늘려 잡았다. 기준중위소득(각종 복지 지원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소득의 중간값)을 역대 가장 높은 6.7% 인상해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보장을 두껍게 하는 게 핵심이다.
내년 예산안의 방향성은 축구로 치면 ‘닥공(닥치고 공격)’ 전술이다. AI를 비롯해 전 세계적인 첨단기술 전환기를 맞아 실기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이 담겼다. 대규모 지출 확대가 그 마중물 역할을 할 거란 기대다. 신설하는 미래대응기금도 나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통상 세수가 늘어나면 지출도 함께 늘리지만 이번엔 추가세수 규모가 워낙 큰 만큼 한 번에 쓰지 않고, 향후 세수가 부족해질 때 재정 보강 수단으로 아껴두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물론 야당을 중심으로 국회의 감시를 피해 자의적으로 재정을 운영하려는 ‘쌈짓돈’이란 비판이 나오는 만큼 효과적인 감시 시스템이 갖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는 내년 예산 편성을 앞두고 난제로 꼽히던 지방교육재정교부금(교육교부금) 개편 방안도 마련했다. 1972년부터 시행했던 내국세 연동 방식을 없애고, 경상(명목) 경제성장률과 학령인구 변화를 반영한 새 산식을 도입한다. 늘어난 세수가 자동으로 지출 확대로 이어지던 관행을 차단했다.
차준홍 기자
단 2년 새 정부 예산 규모가 약 150조원이나 증가한 건 불안 요소다. 정부가 예산안과 함께 내놓은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정부 예산은 2030년 1005조2000억원까지 증가한다. 이재명 대통령 재임 동안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예산은 331조9000억원으로 이는 이전 3명의 대통령 재임 기간 13년 동안의 증가분(347조9000억원)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한번 늘리면 줄이기가 어려운 정부 지출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금의 확장 전략은 몇 년 뒤 부메랑이 돼 돌아올 여지가 있다. 특히 혼인·출산·양육 3대 패키지, 농어촌 기본소득 확대 등 재정 지원 사업의 덩치가 커진 건 중장기적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잠재성장률 제고를 위한 미래 투자라는 점을 앞세우지만, 실질적인 투자 효과에 대한 의문도 따른다. 예컨대 이번 예산안엔 청년층 성장단계별 지원책을 담았지만, 구조적 고용난에 대응하는 전략은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익명을 원한 한 교수는 “8000억원을 들여 청년문화예술패스를 모든 청년으로 확대한다는데 그냥 청년들에게 10만원씩 나눠주는 것뿐 어떤 정책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AI 확산 등으로 취업난은 심화할 수밖에 없고 더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상공인 특별 채무조정, 국립대 등록금 전액 지원 등은 형평성 논란이 불가피하다. 단기적으로는 늘어난 정부 지출이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를 자극할 거란 우려도 적지 않다.
이번 예산안은 국회로 전달돼 심의를 거친다. 사업별로 여야가 치열한 공방을 벌일 전망이다. 특히 올해는 신설한 미래대응기금과 교육교부금법 개정안을 놓고도 격론이 예상된다. 박 장관은 “과감한 재정 투자로 성장의 물꼬를 트고, 그 성장이 다시 재정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선순환 구조를 반드시 안착시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