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에 건설중인 SK하이닉스 반도체 팹 모습. 뉴스1
정부가 반도체와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 프로젝트와 최상위(프런티어)급 AI 모델 개발에 21조3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자율주행차 등 미래 모빌리티와 2030년 달 착륙을 위한 연구개발(R&D) 등 반도체의 뒤를 이을 미래 성장동력 발굴 예산도 대폭 늘렸다. 정부는 1일 국무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의 ‘2027년 예산안’을 의결했다.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서 가장 중점적인 투자 방향으로 앞세운 것은 ‘3대 메가프로젝트와 AI 총력 지원’이다. 관련 예산을 올해 10조8000억원에서 내년 21조3000억원으로 2배 가까이로 늘렸다. 저출생·고령화로 구조적 저성장이 굳어질 위기인 가운데, 최근의 반도체 호황을 잠재성장률 반등으로 이어가기 위해 재정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금은 K반도체 강국의 초격차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고 경쟁하는 시기”라며 “재정은 시장의 부족함을 단순히 보완하는 역할을 넘어 초기 투자자이자 수요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관련 예산은 1조3000억원에서 3조4000억원으로 확대했다. 안정적인 투자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2조6000억원 규모의 ‘반도체산업 경쟁력강화 특별회계’를 신설한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내년 1조5000억원을 통합 지원하고, 수도권과 서남권 생산기지 구축을 앞당기는 데 4000억원을 투입한다. 이 가운데 1000억원은 용인·평택 팹의 조기 가동에 필요한 기반시설 구축에 쓰이고, 3000억원은 서남권 반도체 산단부지로 확정된 광주 군공항 이전 뒷받침에 쓰인다.
김영희 디자이너
피지컬AI 관련 예산으로는 3조1000억원을 배정했다. 제조·건설·국방·돌봄 등 8대 분야에서 AI 로봇 실증사업을 추진하고, 숙련 노동자의 경험과 노하우인 ‘제조 암묵지’를 AI에 학습시키는 기술 등 핵심 R&D에 1조5000억원을 쓴다. 국산 AIDC 산업 생태계 조성에는 5000억원, 반도체·AI 산업에 필요한 전력·용수·산업단지 인프라에는 2조1000억원을 투입한다. 여기에는 전력망 투자 여력을 보강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에 5000억원을 출자하는 예산도 포함됐다.
프런티어급 AI 모델 구축에는 5조2000억원을 쏟아붓는다. 프런티어급 모델은 현시점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 AI 모델로, 현재는 해외 빅테크들이 선두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최상위급 그래픽처리장치(GPU)인 ‘베라루빈’ 1만 장 구매에 3조9000억원, AI 학습용 데이터 확보에 8000억원을 각각 투입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해외 연구자 20명을 유치에도 250억원을 편성했다. 또 국민 누구나 무료로 활용할 수 있는 대국민 AI 서비스 개발에도 2500억원을 투입한다. 여권 재발급, KTX 예매 등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찾아 신청까지 해주는 공공 AI 에이전트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제2의 반도체’ 발굴을 위한 미래 성장엔진 확충에는 총 62조8000억원을 쓴다. AI와 첨단로봇·모빌리티, 첨단바이오, 양자, 반도체 등 10대 전략기술 분야에 15조원을 투입한다. 여기에는 자율주행 실증차량을 올해 200대에서 내년 3000대로 늘리는 등 미래 모빌리티 관련 예산 9000억원이 포함된다. 2030년 달 착륙 목표 달성을 위한 발사체 개발 등의 예산도 2000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3배로 늘린다.
에너지 전환에는 6조6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공장 지붕과 영농형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보급 예산을 1조8000억원으로 확대하고, 햇빛소득마을은 700곳에서 2200곳으로 늘린다. 전기차 보조금 예산은 3조원으로 확대해 지원 물량을 30만대에서 역대 최대인 43만대로 늘린다.
이 밖에 창업과 재도전 지원 등 혁신 생태계 활성화에 4조5000억원, 5대 메가관광권 조성 등 문화강국 도약에 3조7000억원, 중소기업의 성장·도약과 수출 지원에 6조6000억원을 배정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단기간에 AI 관련 신규 사업이 쏟아지면서 부처 간 중복투자를 막고 실질적인 사업화 성과를 끌어내야 하는 점은 과제로 꼽힌다. 재원의 지속 가능성도 변수다. 프런티어급 AI개발, 제조암묵지 RR&D 등 상당수의 사업이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세수를 재원으로 하는 미래대응기금으로 추진된다. 박 장관은 “향후 3~5년으로 갈 것으로 보이는 반도체 사이클이 어떻게 정리될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면서도 “반도체뿐 아니라 타 분야 전략산업의 투자 성과와 기금의 지출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AI 등 유망 산업에 재정이 집중되면서 업황 부진을 겪는 기존 주력 제조업 지원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주로 제조AI 전환과 메가프로젝트에 큰 예산이 편성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자동차와 철강, 조선, 바이오, 디스플레이 등 다른 산업도 등한시하지 않고 관련 예산을 반영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