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전쟁이 러시아를, 이란전쟁이 이란을 각각 궁지로 몰고 트럼프발 관세전쟁이 인도를 흔드는 동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위상이 커졌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공조 전선에는 금이 갔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각각 개막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는 두 정상의 엇갈린 처지를 동시에 드러냈다. 시 주석은 미국의 압박을 받는 러시아·이란·인도 정상을 곁에 세웠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재무장관을 G20에 초청했다가 유럽의 반발을 샀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일(현지시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앞서 나란히 서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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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이란 버팀목 된 중국…SCO, 금융 플랫폼까지 확장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SCO 정상회의를 놓고 “전쟁이 시 주석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부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면서 “동시에 미국 주도 경제전의 한계를 일깨웠다”고 진단했다. 우크라이나전쟁과 이란전쟁이 러시아·이란의 버팀목이 된 중국의 영향력을 키우는 사이 제재를 주도한 미국의 취약점이 표출됐다는 의미다.
2001년 중국·러시아, 중앙아시아 4개국의 안보 협의체로 출발한 SCO는 인도·파키스탄·이란·벨라루스까지 받아들이며 10개 회원국으로 커졌다.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수준의 결속력까지는 아니지만 이들 국가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중국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시 주석은 1일 본회의 연설에서 “대화와 대립, 상생과 제로섬, 다자주의와 일방주의가 치열하게 맞서고 전쟁의 먹구름도 걷히지 않았다”며 “SCO가 역사적 책임을 짊어지고 역사의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1일 본회의에서 채택된 비슈케크 선언은 미국이 아닌 다른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부각했다. 해당 선언은 “유엔 헌장·국제법·WTO 규칙에 어긋나고 세계 경제와 식량·에너지 안보를 해치는 일방적 강제조치에 반대한다”고 명시했다. 이어 “자국 통화 결제 확대 로드맵을 계속 이행해야 한다”며 “SCO 개발은행 설립에 진전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란이 제시한 지정은행을 SCO 은행간협의체 업무에 참여시키는 문제도 조속히 해결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SCO 개발은행은 경제 수단을 무기로 사용하는 국가들의 금융시스템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도 자국 통화 결제 확대, SCO 은행, 수출·투자보험 연합, SCO 에너지 컨소시엄 창설을 제안했다. 선언의 ‘일방적 강제조치’와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경제 수단의 무기화’ 등 표현은 사실상 미국의 제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와 이란은 물론 다른 SCO 국가들도 함께 나서 SCO를 미국에 대항하는 금융·에너지 방파제로 키우자는 데 힘을 실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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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이란엔 생명줄, 인도엔 ‘대미 보험’
러시아 입장에서 중국은 우크라이나전쟁을 이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경제적 생명줄이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산 원유의 판로가 줄자 중국은 할인된 가격에 이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중국뿐 아니라 SCO 내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가 제재를 피해 물품을 수입하고 대금을 결제하는 우회로가 됐다.
그 과정에서 중·러 관계의 무게중심은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 시 주석은 31일 푸틴 대통령과 만나 “양국 관계의 기반이 더욱 굳건해지고 전망도 밝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무비자 왕래와 북극항로 협력을 거론하며 호응했다. 한때 러시아의 세력권이던 키르기스스탄에서 시 주석이 회의의 중심에 선 장면 자체가 달라진 양국의 처지를 반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SCO 회원국 정상들이 1일(현지시간) 비슈케크 정상회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란의 경우, 중국은 원유를 계속 팔 수 있는 마지막 대형 시장이자 외교적 방패다. 중국이 거래를 유지하는 한 미국의 대이란 제재망에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 미국은 이란을 지원하는 국가에 ‘경제적 디데이(D-Day)’를 안기겠다며 경제적 추방 작전을 공언하면서도 중국 대형 금융기관에 대한 제재는 유보했다. 중국에 대한 제재가 미·중 경제 휴전을 깨고 미국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SCO 소속인 파키스탄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고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인도는 러시아·이란과 달리 친중국 성향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을 관리하며 외교적 선택지를 늘릴 필요가 상당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에 지난해 8월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이유로 인도산 제품에 대한 미국 관세가 50%까지 치솟는 직격탄을 맞았던 경험에서다. 대미 의존도를 줄이려는 보험 개념의 선택지로 중국이 떠오를 만하다.
인도가 이런 보험을 확장하려는 건 전날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발언에서도 드러났다. 모디 총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끝없는 전쟁에서 종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하면서도 “푸틴은 나의 친구”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러시아산 원유의 주요 구매국으로 떠오른 인도는 미국의 압박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줄였다가도 이란전쟁으로 원유 공급 불안이 커지자 다시 러시아산 원유로 눈을 돌렸다.
모디 총리는 같은 날 페제시키안 대통령과도 만나 “양국 교역 품목을 확대하고 다변화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우호국들에 이란과의 경제 관계를 끊으라고 압박하는 와중에 다른 얘기를 꺼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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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고립 외치며 러시아는 초청…트럼프의 딜레마
애슈빌에서 열린 G20 회의에서는 국제 공조를 끌어내지 못하는 미국의 난맥상이 드러났다. 미국은 우호 국가들에 이란과 경제관계를 끊으라며 경제적 추방 작전을 추진하면서도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처음으로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을 대면회의에 초청했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일 등 유럽 국가는 러시아를 정상적인 손님처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크게 반발했다. 실루아노프 장관을 단체 사진에서 뺄 정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모두와 잘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며 초청을 정당화했다. 여기엔 우크라이나전쟁을 조기에 매듭짓고 이란 고립이라는 최우선 과제에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셈법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선 딜레마에 처했다. 이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려면 중국을 움직여야 하는데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면 어렵게 유지해온 미·중 경제 휴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오는 24일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얼마나 강한 어조로 이란 문제에 협조를 요구할지 미지수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반발로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촬영에서 제외됐다. AFP=연합뉴스
바이든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대만 담당 선임국장을 지낸 줄리언 게워츠는 NYT에 “트럼프가 스스로 궁지로 몰렸다”며 “이란에 대한 압박 강화와 중국과 휴전 유지라는 두 목표를 조화시키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위협과 약속 모두 중국 입장에선 연필로 쓰인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비유했다. 중국이 러시아산과 이란산 원유를 계속 사들이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경고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서 발언 자체의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