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 호황에 기댄 820조9000억원 규모의 내년 예산을 확정했다. 올해 본예산 대비 12.8%(93조원) 불어난 ‘울트라 예산’이다. 호남 반도체 공장 등 3대 메가프로젝트를 비롯해 연구개발·청년고용·국방비 등에서 정부 지출이 대폭 늘어난다. 정부는 법인세와 소득세가 늘면서 내년 총수입이 올해보다 30.4%(205조6000억원) 증가한 880조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봤다. 이를 토대로 거침없는 지출에 나서는 것인데, 문제는 반도체 특수의 지속성 여부다.
경기도 용인시 용인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공사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글로벌 경제엔 한국 경제를 언제든 뒤흔들 회색 코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당장 반도체 호황의 피크아웃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에 나선 빅테크들이 회사채 등 대규모 차입을 하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40조 달러를 돌파한 미국의 국가부채도 글로벌 금융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물가 상승으로 미 연방준비제도가 기준금리 추가 인상에 나선다면 한국은 2008년 금융위기와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못지않은 경제 충격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튼튼한 재정 방파제가 필요하다. 반도체 기업 법인세로만 100조원 넘는 세수를 얻게 된 정부는 162조3000억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설립한다. 이 중 45조4000억원은 예산에 포함하고 국채 신규 발행 축소에 12조5000억원을 쓴 뒤 나머지는 여유자금으로 두기로 했다. 104조4000억원의 비상금이 생기는 셈이다. 문제는 이 막대한 여유자금이 정권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꺼내 쓰는 쌈짓돈처럼 운용될 가능성이다.
정부는 확장 재정으로 잠재성장률 반등과 양극화 완화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거창한 구호 속에 국가공무원 3851명 증원을 비롯해 방만한 지출과 일회성·현금성 지출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정부는 100조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과 성장률 상승으로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51.6%에서 48.3%로 낮아질 것으로 낙관한다. 그러나 한번 늘어난 지출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법이다.
국회는 예산 심의 과정에서 선심성 지출을 과감히 삭감하고 미래대응기금의 여유자금을 국가부채 상환에 대폭 투입해야 한다. 위기는 여유 있을 때 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