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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영웅전] 조광조가 남긴 교훈

중앙일보

2026.09.02 08:04 2026.09.0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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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사진)의 행적을 거론하기에는 조심스럽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에서 성장했는데 이때 큰 선비인 김굉필(金宏弼)을 만나 학문을 깨우쳤다. 자질이 명민했던 그는 33세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남자의 3대 액운인 소년등과(少年登科)일 수도 있다.

조광조는 공자와 주자의 가르침에 고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대궐 안에서 도교의 의식을 치르는 소격서(昭格署)를 헐어야 한다고 왕(중종)을 설득했다. 왕은 버텼고, 조광조는 집요하게 왕을 설득했다. 심할 때는 새벽닭이 울도록 어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세종도 잘못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고 상소했을 때 주변은 놀랐고, 왕은 마음을 다쳤다. 그를 포함하여 소격서에 대한 반대 상소가 265회였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의 기득권과 부패를 혐오했고, 특히 중종반정을 등에 업고 행세하는 신흥사대부의 방자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공자께서 “나에게 3년의 권력을 주면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 왕을 설득하여 95명의 훈작을 삭탈했다. 이 과정에서 3년 동안에 300회의 상소를 올렸다. 『경국대전』을 뛰어넘어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추천과 면접으로 공직을 뽑았다. 왕은 지치고 지겨워했다.

그런 조광조의 진심을 의심할 수는 없다. 로베스피에르가 그렇듯이 그는 자신과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개혁의 속도 조절 같은 것은 유념하지 않은 채 질주했다. 오로지 조광조만을 칭송했던 율곡도 이 점을 탓했다. 결국 조광조는 반정 공신을 몰아낸 지 나흘째 되는 날 자기도 귀양을 떠나 37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목적이 수단을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다. 종교나 정치에서 과격한 근본주의는 그토록 무섭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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