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WILD’의 소재가 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 있는 캘리포니아 캄포(Campo)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약 2650마일(4270㎞)을 잇는다.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 3개 주를 관통하며 사막과 시에라네바다, 캐스케이드 산맥을 차례로 지난다. 트레일 초반부터 물을 구하기 어려운 사막 구간을 지나야 하며, 이후에도 물을 구하기 어려운 구간이 곳곳에 있다. 또 캘리포니아 최고봉 휘트니산(4421m)을 넘고, 이후에도 험난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기다린다. 워싱턴주에 들어선 뒤에도 스티븐스 패스를 지나 캐나다 국경까지 험준한 캐스케이드 산맥을 넘어야 한다. 보통 완주 기간은 150~180일이다.
가장 잘 알려진 PCT 트레커는 셰릴 스트레이드(58)다. 그는 1995년 약 1100마일을 걸었고, 2012년 『와일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서 길을 잃고 다시 찾다』를 썼다. 영화는 2년 후 나왔다. 당시 그는 완전히 망가진 삶을 다시 추스리고 싶어 이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기존의 성(Nyland)을 버리고 “스트레이드(Strayed, 길 잃은 떠돌이)”라는 새 이름도 그렇게 얻었다.
협회(PCTA)는 PCT를 미국 서부의 자연과 야생을 경험하는 장거리 트레일로 소개한다. 길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데 있다. 사람들은 이 길에서 무언가를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짐을 줄이고, 익숙하고 편리한 문명과 거리를 두고, 불편한 길에서 먹고 자며 걷는다. 봄에 멕시코 국경을 출발해 눈 오기 전 캐나다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춘하추동'을 숲에서 보낸다. 그래서 PCT를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한다.
올 시즌 이런 통념을 무너뜨리는 한 명의 트레커가 PCT에 나타났다. 그는 출발 전부터 전 세계 하이커의 관심을 끌었다. 트레커와는 거리가 먼 야한 옷차림을 하고 온리팬스(OnlyFans)를 통해 트레킹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한 캘린 르내(22)가 주인공이다.
22주 전, PCT를 출발할 당시의 캠린 르내. 사진 캠린 르내 SNS
그의 외모는 확실히 달랐다. 초창기 캠린은 브라톱이나 스포츠브라, 핫팬츠 등 노출이 많은 복장 차림을 SNS에 거의 매일 올렸다. 때로는 노브라로 산을 걷는 모습도 보여줬다. 기능성과 보온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장거리 트레커와 달리 그는 ‘노출 트레커’였다.
유료 구독형 크리에이터 미디어 플랫폼을 표방하는 온리팬스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콘텐트를 유통해 문제가 되는 곳이다.물론 캘린은 음란물을 게시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 트레커가 성지(聖地)로 치는 PCT를 걸으면서 이런 사진을 올리자 논란이 일었다. 그의 SNS 댓글에는 “PCT를 우습게 안다”, “그는 진짜 트레커가 아니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돈벌이를 위해 PCT를 이용한다”는 댓글도 있었다. PCT에 드는 비용은 2000만원정도(미국 외 거주자)로 알려졌다.
캠린이 휘트니산에서 구조 헬기를 부르면서 논란은 더해졌다. 지난 5월 20일, 그는 정상 아래 해발 4115m 지점에서 심한 구토를 했고 상태가 악화하자 SOS를 청했다. 그러나 지나는 이가 없었다. 다행히 이튿날 한 트레커가 캠린을 발견하고 눈길을 함께 내려왔다. 이후에도 구토가 계속되자 결국 구조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캠린은 구조 과정을 SNS에 올렸고,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등반 경험이 일천하고 장비도 시원찮은 초보자가 눈이 남아 있는 4000m대 산을 혼자 오르다 결국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에 대해 캠린은 “정수하지 않은 물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PCT를 걷는 트레커가 겪는 어려움 중 하나다. 휘트니에서 그를 도운 댄 루지도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비난한다”며 캠린을 옹호했다.
그는 휘트니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하루 20~25마일(32~40㎞)을 걸었다. PCT 트레커 중에서도 빠른 편에 속한다. 그가 SNS에 게재한 사진을 보면 침낭은 얇고, 보온 의류도 많이 챙기지 않았다. 그래서 등에 멘 배낭의 부피가 크지 않다.
캠린의 PCT 입문은 즉흥적이었다. 브라질 여행 중 환각 성분이 있는 버섯을 먹은 뒤 영화 ‘와일드’를 떠올렸고, 인터넷으로 PCT에 관한 정보를 찾아본 뒤 “나는 올해 여기를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지난 2월 말이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26일, 자신의 생일에 맞춰 PCT에 들어섰다.
그는 아웃사이드(OUTSIDE)와 인터뷰에서 “인생은 매우 짧다. 나는 신나고, 성취감을 느끼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정해진 방식대로 살다 보면 자신을 잃을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고민하는 것이)가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알려주는 길잡이가 된다”고 했다.
휘트니에서 좌초한 후 그의 SNS 게시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결국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온라인에서 쏟아졌다. 여성 클라이머이자 아웃도어 저널리스트인 메리 안디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기어정키에 쓴 글에서 캠린의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baby voice)”와 핫핑크색 핫팬츠·스포츠브라 차림이 자신을 불편하게 했다고 털어놨다. SNS에서 매일 화장하고 머리를 손질하는 모습도 전형적인 장거리 트레커와는 달랐다. 특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PCT를 걷는다는 것이 가장 못마땅했다.
메리는 캠린이 신은 신발을 보고 장비 전문가에게 평가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의 장비에 대해 이렇게 간섭하려 하지?” 자문한 뒤 “다른 하이커라면 이렇게까지 장비와 복장을 현미경처럼 파고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캠린의 ‘문제’가 정말 위험한 행동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여성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자문하게 됐다”고 했다. 메리가 내린 결론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는 칼럼 마지막에 “캠린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트레일을 걷고 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됐다”면서 “그를 그냥 걷게 두자(Let the woman hike)”고 썼다.
캠린은 지난 6월 8일 시에라네바다 구간을 걷는 사진과 메시지를 SNS에 올렸다. 분홍색 핫팬츠와 브라탑, 화려한 화장도 여전했다. 다만 게시글은 뜸해졌고, 실제 촬영 시점보다 늦게 게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인스타그램 구독자는 출발 당시 9만명에서 6월 말 20만명, 그리고 지금은 31만명으로 늘었다.
PCT 트레커 Kamryn Renae. 사진 캠린 르네 SNS
그리고 지난 1일 한장의 사진과 함께 “2650마일 중 2300마일 걷다(2300/2650 miles hiked!!)”라고 썼다. 그가 SNS에 올린 글이 맞다면 워싱턴주 화이트 패스(2295마일)를 지난 지점이다. 핑크 일색 차림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베테랑 트레커의 티가 났다. 머리를 단정히 묶고 등에 멘 배낭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손에 등산 스틱도 들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약 355마일(570㎞). 2~3주 안에 완주할 수 있는 거리다. 단, 올해 PCT는 산불로 80마일(약 130㎞, 9월 초 기준)이 구간이 폐쇄됐다. 특히 트레일 막바지인 워싱턴주에 폐쇄 구간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PCT는 오랫동안 특별한 길로 사랑받았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문명에서 벗어나 자신을 시험하는 길이다. 영화 『와일드』로 그 이미지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캠린은 PCT를 성지처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워싱턴주 일간지 더 스포크맨 리뷰에 따르면, 셰릴 스트레이드가 PCT를 걸었던 1995년에는 75명이 PCT에 도전해 10명이 완주했다. 근래에는 수백명으로 늘었다. 사람이 늘면서 트레커의 스타일도 다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