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권영전 특파원 =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인 애플파크에는 거대한 아치로 이뤄진 무지개 조형물이 서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무지개가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애플의 전 최고경영자(CEO) 팀 쿡이 내건 성소수자 포용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마련한 신사옥 계획에 따라 세워진 애플파크에 무지개가 들어선 것은 애플의 전 디자인 책임자 조니 아이브의 아이디어로, 잡스에 대한 추모 의미를 담은 것이다.
창업 초기부터 1998년 이전까지 20여년간 애플의 사과 모양 로고는 여섯 줄의 무지개색이 입혀진 모습이었다.
이는 애플의 첫 완제품 컴퓨터 '애플Ⅱ'가 컬러 화면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애플파크의 무지개 조형물은 이 당시의 애플 로고를 3차원 형태로 되살린 것이다. 일반적인 무지개와 달리 초록, 노랑, 주황, 빨강, 보라, 파랑이라는 색상 순서까지 똑같다.
애플 로고에서 무지개를 지운 사람도 잡스였다. 한때 회사에서 쫓겨났다가 1998년 다시 애플에 복귀한 그는 알록달록했던 로고를 단색으로 바꿨다.
최소주의(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채택하며 현대적인 감각을 선보인 새 제품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게 주된 관측이다.
잡스의 무지개는 시작부터 끝까지 제품의 언어였던 셈이다.
잡스의 뒤를 이어 애플을 이끌게 된 팀 쿡은 2014년 10월 언론 기고를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직접 '커밍아웃'했다.
당시 쿡은 "애플의 CEO가 게이라는 소식이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고민하거나 혼자라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나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희생하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며 그런 결심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애플파크의 무지개가 팀 쿡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퍼진 것은 단순히 그가 성소수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쿡은 재임 기간 다양성과 평등, 환경을 애플의 새로운 문화로 정착시켰다.
매년 애플워치와 같은 제품에 성소수자와 다양성을 상징하는 '자긍심'(프라이드) 디자인을 적용한 모델을 선보이고, 장애인을 위한 제품 생산에도 힘을 쏟았다.
제품과 공급망 전체에서 탄소중립을 이룰 것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실제 이를 상당 부분 달성하기도 했다.
한번은 애플의 환경 관련 목표가 회사 이익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시각장애인이 우리 기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할 때 나는 빌어먹을(bloody) 투자수익률(ROI)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면서 환경·보건·안전 문제에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처럼 쿡은 15년간 애플을 경영하면서 원래 잡스의 것이었던 무지개를 자신의 것으로 재인식시켰다.
이제 시선은 지난 1일 취임한 존 터너스 신임 CEO에게 쏠리고 있다.
하드웨어 전문가이자 철저한 실용주의자로 평가받는 터너스는 애플의 방향성을 제품과 사용자 중심으로 돌린 주역으로 꼽힌다.
애플이 지난 2021년 출시한 맥북 프로(16인치)는 전작과 견줘 0.6㎜ 두껍고 무게도 0.1∼0.2㎏ 더 나갔다.
휴대성을 일부 희생한 결정이었지만, 전작에서 빼버렸던 자석 충전단자 '맥세이프'와 외장 모니터 연결용 HDMI 단자, SD카드 슬롯 등을 되살리면서 도리어 이용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터너스가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담당 수석부사장에 취임한 이후 변경된 것으로, 디자인보다 이용자를 중시하는 그의 제품 철학과 실용주의를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맥북 프로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과거 자신이 밀어붙였던 것으로 알려진 나비식 키보드와 키보드 상단 '터치바'를 없애고, 기존의 가위식 키보드와 실물 기능 키로 되돌리는 등 실패를 과감하게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잡스가 혁신가였고, 쿡이 공급망과 회사 시스템의 천재였다면, 터너스는 제품을 실물로 구현해온 엔지니어로 평가된다.
잡스가 무지개의 색을 정하고, 쿡이 무지개에 가치를 더했다면, 터너스는 그 무지개를 실제 빚어온 인물이었던 셈이다.
애플은 2019년 임시 무대로 만들었던 무지개 조형물을 튼튼한 영구 구조물로 개조해 지난해 새로 설치했다.
터너스가 애플을 그처럼 견고한 회사로 엔지니어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