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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오락으로 만든 사회, 지금도 유효한 경고

Los Angeles

2026.09.09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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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 (The Hunger Game)
십대 생존극 넘어선 디스토피아 신화
오락으로 포장된 폭력과 권력의 민낯
넷플릭스 재공개로 되살아난 문제의식
‘헝거게임’ 시리즈 다섯 편이 지난 7월 미국 넷플릭스에 한꺼번에 공개됐다. 프리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2023)’까지 포함해서다. [Lionsgate]

‘헝거게임’ 시리즈 다섯 편이 지난 7월 미국 넷플릭스에 한꺼번에 공개됐다. 프리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2023)’까지 포함해서다. [Lionsgate]

YA(Young Adult) 프랜차이즈란 10대 후반~20대 초반 독자층을 겨냥한 소설 원작을 대형 시리즈 영화로 만든 작품군을 가리킨다. 디스토피아 세계관, 십대 주인공, 삼각관계 로맨스, 권력에 맞서는 반란 서사 등을 주로 다룬다. ‘헝거게임’은 이런 YA 공식의 원형을 만든 영화이다.
 
그 물결의 발원지에서 14년이 지난 지금, ‘헝거게임’ 시리즈 다섯 편이 지난 7월 넷플릭스에 한꺼번에 공개됐다. 프리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2023)’까지 포함해서다.
 
영화 ‘헝거게임’은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이 10대를 위한 영화화라고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개봉 첫 주말에만 북미에서 1억525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제작사 라이온스게이트 역사상 최대 오프닝을 기록했고, 전 세계 누적 흥행은 6억 940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 장르가 청소년 픽션의 경계를 훌쩍 넘어 대중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충격파는 이후 수년간 비슷한 공식의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계기가 됐다.
 
‘헝거게임’이 겨냥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폭력을 구경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Lionsgate]

‘헝거게임’이 겨냥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폭력을 구경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Lionsgate]

첫 편, 가난한 12구역 출신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은 어린 동생 대신 자원해 게임에 뛰어든다. 매년 판엠의 청소년들을 뽑아 최후의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이른바 헝거게임!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이 죽음의 경기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영화는 이 ‘소박한 바람’을 정치적 균열로 바꾼다. 판엠의 권력은 아이들의 죽음을 생방송하고, 공포를 오락으로 포장해 지배를 이어간다.
 
수잔 콜린스의 원작 소설은 철저한 1인칭으로 쓰였다. 캣니스의 눈과 귀가 곧 독자의 눈과 귀다. 배고픔의 감각, 공포의 질감, 죽음 앞에서 떠오르는 잡념까지, 독자는 인물의 안쪽에 밀착한 채 판엠이라는 세계를 경험한다.
 
영화는 이 1인칭의 두터운 벽을 걷어낸다. 캣니스의 내면 독백을 다른 인물의 대사와 행동으로 풀어낸다. 카메라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순간, 이 이야기는 생존자의 독백에서 관찰 기록물로 옮겨간다. 효율적인 선택, 그러나 원작이 품었던 밀착된 공포감은 상당 부분 희석된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강화한다. 이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화의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시비스킷(2003)’과 ‘플레전트빌(1998)’을 연출한 게리 로스 감독은 핸드헬드 카메라로 판엠의 빈곤한 일상과 생존의 불안을 잡아낸다. 노스캐롤라이나 실제 숲과 낡은 공장 마을에서 찍은 전반부는 설득력 있는 시각적 질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아레나 교전 장면에서는 역효과를 낳는다. PG-13 등급을 맞추기 위해 폭력 장면을 우회한 결과, 과도한 클로즈업과 빠른 편집이 겹치면서 공간 관계가 뭉개진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컷이 바뀐다.
 
‘캣칭 파이어(2013)’부터 프랜시스 로렌스가 연출을 맡은 뒤 시리즈가 눈에 띄게 안정됐다. 1편의 허술함은 원작 탓이라기보다 연출의 문제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로스는 이후 시리즈에서 하차했다.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것은 제니퍼 로렌스의 힘이다. 캐스팅 당시 약 30명의 배우가 경합했다. 로렌스는 ‘윈터스 본(2010)’에서 이미 유사한 생존자를 연기한 바 있었고, 원작자 콜린스도 “책의 캐릭터를 진정으로 포착한 유일한 배우”라고 평했다. 제니퍼 로렌스의 몸이 스크린을 채우는 순간, 이 영화의 불완전함은 어느 정도 용서된다.
 
감정을 말로 내뱉는 법을 배우지 못한 캐릭터 캣니스는 애정을 표현할 줄 모른다. 공포와 분노도 내면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로렌스는 그 침묵을 신체 언어만으로 연기해 낸다.
 
동생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 열차 안에서 창밖을 응시하는 표정 하나에 인물의 무게가 압축돼 있다. 화면 속 대부분의 시간을 로렌스의 얼굴이 차지하는 이 영화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 얼굴 덕분이다.
 
두 차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우디 해럴슨의 냉소 어린 헤이미치, 도널드 서덜랜드의 서늘한 스노우 대통령, 레니 크라비츠의 절제된 시나도 앙상블을 고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이 영화가 단순한 청소년 오락물 이상의 자리로 뛰어오를 수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존재감 때문이다.
 
당신은 이 게임의 참가자인가, 아니면 관중인가. 영화 속 게임은 끝났지만, 그 물음은 아직 유효하다. [Lionsgate]

당신은 이 게임의 참가자인가, 아니면 관중인가. 영화 속 게임은 끝났지만, 그 물음은 아직 유효하다. [Lionsgate]

영화의 진짜 주제는 생존이 아니라 구경거리다. 진행자 시저 플리커맨의 쇼 진행 방식은 미국 토크쇼의 문법을 빌려온다. 공물들은 스폰서를 끌어들이기 위해 단장하고 미소 짓는다. 아레나 밖 시청자들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듯 물자를 보낸다. 영화관에 앉은 우리 역시 캣니스의 생존을 바라며 이 구경거리를 즐기고 있다.
 
캐피톨의 화려한 열차 안에서 흘러넘치는 음식과 12구역의 굶주린 얼굴이 교차되는 장면에서, 영화는 잠시 계급의 날을 세운다. 자기반영적 구조 안에서 관객을 공범자 자리에 앉힌다. 일본 영화 ‘배틀 로얄(2000)’의 미국판이라는 비교가 나오는 지점이다. ‘헝거게임’이 겨냥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보다 그 폭력을 구경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제임스 뉴턴 하워드의 음악은 그 불편한 쾌감에 꾸준히 긴장감을 더한다.
 
영화 속에서 12구역 주민들은 가운데 세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가 캣니스를 향해 들어 올린다. 이 세 손가락 인사는 판엠 사회에서 작별, 감사, 경의를 뜻하는 오래된 관습으로 설정돼 있다. 태국에서는 2014년 군사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는 2021년 쿠데타 이후 시위대가 세 손가락 경례를 실제 저항의 언어로 가져다 썼다. 허구의 기호가 현실 정치의 언어가 된 것이다.
 
계급과 미디어, 권력의 자기 재생산이라는 주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낡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열네 살이 된 이 영화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연출의 허술함과 편집의 혼란은 재관람에도 거슬린다.
 
그럼에도 2026년 넷플릭스 공개를 계기로 다시 마주한 ‘헝거게임’이 던지는 물음, 당신은 이 게임의 참가자인가, 아니면 관중인가. 영화 ‘헝거게임’은 끝났지만, 그 물음은 아직도 유효하다.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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