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가 EBS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EBS
한국인 최초로 미국물리학회(APS) 회장을 지낸 김영기(64) 미국 시카고대 물리학과 석좌교수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김 교수는 오는 10월부터 방송되는 한국교육방송(EBS)의 교양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에서 만물의 기원인 작은 알맹이와 140억년 우주의 역사에 대해 강의할 예정이다.
김 교수의 특기는 양성자와 반양성자, 혹은 양성자끼리 서로 충돌시켜 소립자의 질량 근원을 알아내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그를 가리켜 ‘충돌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지난 11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김 교수와 만나 미국 대학 현황과 입자물리 연구 흐름에 관해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 한국 대학들이 AI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 미국 상황은 어떤가.
A : AI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상황이니, 도대체 대학의 역할이 뭐가 될까 논의가 많다. 다만 물리학자로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요즘 학생들은 답을 너무 빨리 알아낸다는 점이다. 약간 막히는 게 있으면 AI에게 물어보고, 답도 쭉쭉 잘 나온다. 학생들이 사고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이틀 정도 끙끙거리며 고민해 답을 찾아가는 경험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과학 연구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한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묵묵히 고민하는 끈기가 중요하다.
Q : 2024년 미국물리학회 회장을 지냈다. 개성 강한 과학자들을 어떻게 이끌었나.
A : 미국에서 박사 과정 시절부터 입자 검출기를 만들고 데이터로 실험을 하면서 리더십을 배우고 키웠다. 대학 1~2학년 때 동아리 탈춤반에서 활동하며 선후배, 동기들로부터 배운 인간관계와 리더십도 학회를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됐다.
2016년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가 미국 예일대에서 강연한 입자물리학 자료. 원자와 원자핵, 양성자와 중성자, 쿼크가 발견된 시기를 표기했다. 사진 예일대
Q : ‘서울대 10개 만들기’로 한국에서도 국립대 중심으로 입자물리학에 필요한 가속기 연구에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A :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는 중이온가속기를 활용하기 위해 충남대와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인근에 과학벨트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속기를 활용해 소립자를 연구하는 건 막대한 예산과 인력, 기술이 필요하다. 한 국가 안에서만 이뤄질 수는 없다. 미국과 유럽, 일본 가속기에는 국제 공동 연구진이 같이 참여한다. 한국이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계속 국제 연구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Q : 트럼프 행정부가 유학생 비자를 4년으로 제한해 미국 유학을 머뭇거리는 분위기다.
A : AI나 양자컴퓨터와 같은 경우는 경제와 국방 분야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분위기이지만 기초 과학에서 국제 협업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에는 미국 에너지부와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협력의향서를 체결하고, 전자-이온 충돌기나 심층 지하 중성미자 실험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김영기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가 EBS 프로그램 ‘위대한 수업’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방송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EBS
Q : 최근 한국에서는 중입자 가속기로 암을 치료하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입자물리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A : 내가 30년 넘게 소립자 연구를 했던 미국 페르미연구소에서 1980년대부터 병원과 기업체에 가속기 기술을 전수했다. 가속기를 이용해 양성자와 같은 입자의 에너지와 빔(Beam·입자 다발)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런 기능으로 정상세포를 피해 암세포만 타격할 수 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는 국제 공동 연구를 많이 하다 보니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기술을 개발했는데, 그게 인터넷의 시초인 월드와이드웹(WWW)이 됐다.
Q : 입자물리만 40년 가까이 연구했다. 그동안 학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A : 이론으로만 추정했던 힉스 입자가 2012년에 발견되면서 최근엔 그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는 편이다. 가속기를 이용해 질량이 큰 소립자들을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힉스 입자의 질량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힉스 질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면 가속기의 에너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 있다.
Q :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실존 인물이었던 고 이휘소 박사(1935~1977)가 힉스를 연구했다.
A : 살아 계셨다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이었다. 그의 제자였던 고 강주상 교수(1941~2017)가 고려대에서 양자역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내가 대학 때 입자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소설에서 그려진 핵물리학자는 허구다. 순수 입자물리학자셨다. 내년이 타계 50주년이라 학계에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김영기 교수 = 1962년 경북 경산 과수원집 넷째 딸로 태어나 대구 남산여고(현 남산고)를 거쳐 1980년 고려대 물리학과로 진학했다. 1990년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뒤 1996년부터 버클리-캘리포니아대 교수를 지냈다. 이후 2003년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2005년 호암상 과학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2006~2013년 미국 페르미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2002년 시드니 네글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대구에서 전통혼례로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