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사람을 끊는 시대, 사랑은 가능한가 질문한 이창동

중앙일보

2026.09.13 08:16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 영화의 다양성이 더욱 넓어지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남겼다. [로이터=연합뉴스]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 영화의 다양성이 더욱 넓어지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남겼다. [로이터=연합뉴스]

“노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끊어져가는 시대에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이창동(72) 감독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떨렸다. 이 감독의 ‘가능한 사랑’이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에서 폐막한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2등상인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2012)가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바 있지만, 한국 영화의 심사위원대상은 이번이 최초다. ‘오아시스’(2002)로 감독상·신인배우상(문소리) 2관왕에 올랐던 이 감독이 24년 만에 한국 영화에 새 기록을 썼다. 황금사자상은 메이 엘투키 감독의 덴마크 영화 ‘언노운 우먼’이 받았다.

‘가능한 사랑’은 글로벌 무대 속 한국 영화 지형도에서 이 감독이 갖는 독보적 위치를 보여주는 영화다. 최근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봉준호·박찬욱·연상호·나홍진·류승완 등 할리우드식 장르영화 문법을 우리 식으로 재해석하고 변주한 감독들의 작품이 각광받아 왔다. 그러나 ‘가능한 사랑’은 이민자·인공지능(AI)이 노동력을 대체하며 대량 해고가 가능해진 시대를 어떤 블랙코미디나 스릴러적 장치, 공상과학적 상상 없이 비루한 현실 그대로 통렬하게 돌파한다. 장르 문법에 의존하지 않고 시대와 삶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란 뜻이다.

‘가능한 사랑’에서 해고 노동자인 남편 호석(설경구)과 열 살 아들을 둔 미옥(전도연)은 해고 노동자를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함께 여름을 나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언제든 ‘가난 관광’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예지와 달리 새로운 친구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미옥의 모습은 안쓰러울 뿐이다. 미국 타임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포착해낸다”며 ‘가능한 사랑’을 주목했다. 영국 매체 타임아웃은 ‘가능한 사랑’에 대해 “봉준호의 ‘기생충’(2019),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2025)와 함께 현대사회의 계급 문제를 보여준 암울한 현대 우화 삼부작”(타임아웃)으로 평했다.

소설가로 먼저 데뷔한 이창동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 ‘초록물고기’(1997)부터 30년 가까이 단 일곱 편의 장편영화로 세계적 거장에 올라섰다.

그의 영화는 현실 세계 질곡에 놓인 인물들의 살아 숨 쉬는 아픔을 묘사해 왔다. ‘박하사탕’(1999)에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군인으로 출동해 영혼이 망가진 남성(설경구)이, ‘시’(2010)엔 손자의 집단 성폭행 가해 현실에 절망하는 시인 지망생 할머니(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밀양’(2007)은 구원과 용서라는 종교적 메타포를 철학적으로 풀어냈고, ‘버닝’(2018)은 신자유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아귀 속에서 글조차 짓기 힘든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 청년(유아인)을 그렸다.

‘가능한 사랑’은 창작자로서 타인의 아픔을 다뤄온 감독 자신의 성찰을 담았다. 오랜 구상 끝에 고통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치유’로 나아가는 과정을 모색하는 영화로 완성해냈다. 그는 베네치아 출국 전 기자회견에서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 그럼에도 어떤 사랑이 가능한지, 사랑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담고자 했다”고 출사표를 밝히기도 했다.

‘가능한 사랑’은 오는 23일 국내 극장에서 개봉한 뒤, 11월 6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다.





나원정.정은혜([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