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생산한 더블데이터레이트5(DDR5)와 저전력더블데이터레이트5X(LPDDR5X) 기반 D램 제품. 사진 CXMT
한국 반도체의 핵심 동력인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도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중국은 D램 시장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HBM 추격 속도를 더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13일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한·중 메모리 반도체 기술 격차는 HBM 3년, D램 2년, 낸드플래시 1년으로 좁혀졌다. 수년 전만 해도 5년 이상으로 평가받던 격차가, 메모리 공정상 사실상 ‘한 세대’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차준홍 기자
이는 실체로도 드러나고 있다.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최근 알리바바의 자회사 T헤드 등 현지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와 함께 5세대 HBM인 ‘HBM3E’를 테스트 중이며, 이르면 내년부터 이를 탑재한 정보기술(IT)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HBM3E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생산하는 HBM4보다 불과 한 세대 차이나는 제품이다.
백서인 한양대 중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 추격 속도는 기존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 1년을 사실상 2~3년처럼 활용하는 셈”이라며 “정부의 지원과 거대한 내수 시장, 연구 생태계가 맞물려 기술 축적이 급속히 가속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차준홍 기자
중국의 HBM 추격이 위협적인 점은 미국의 제재를 우회해 이뤄냈기 때문이다. 첨단 HBM 제조에는 미세 회로를 그리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필수적이지만, 대중 수출 통제로 중국은 EUV 장비를 들여오지 못했다.
이에 중국은 반도체를 쌓고 이어 붙이는 ‘후공정(첨단 패키징)’과 ‘이종 결합’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대만의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CXMT는 중국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가 보유한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접합 방식인 ‘X태킹’ 기술을 자사 HBM 설계에 도입했다. 웨이퍼 두 장을 직접 맞붙여 회로 간 거리를 좁히는 방식으로, EUV 없이도 대역폭을 넓히고 발열을 낮추는 방법이다.
차준홍 기자
여기에 우한신신(웨이퍼 패키징)·통푸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조립·검사) 등 주요 후공정 기업들이 분업 체계를 가동하며 ‘HBM 연합군’을 꾸렸다. 화웨이 역시 메모리를 쌓는 대신 반으로 접는 ‘로직 폴딩’ 방식으로 2031년까지 EUV 없이 1.4나노급 공정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기업이 미국의 규제에도 메모리 분야 기술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수익 첨단 제품인 HBM과 서버용 메모리에 생산 능력을 집중한 것도 역설적으로 기회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 현금을 손에 쥔 중국 기업들이 이 자금을 차세대 설비 증설과 HBM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사이클’을 가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준홍 기자
전 세계 PC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범용 D램(DDR5 등)의 품귀 현상이 심화하면서 올해 1분기 범용 D램 가격은 전 분기 대비 98% 폭등했다. 빈자리를 파고든 CXMT와 YMTC는 범용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넓혔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 2분기 글로벌 D램 시장에서 CXMT의 점유율은 10%로, 전년(4%) 대비 두 배 이상 뛰며 삼성전자(38%), SK하이닉스(25%), 마이크론(24%)에 이어 4위로 올라섰다. YMTC의 낸드플래시 점유율 역시 9%에서 14%로 상승했다. YMTC는 지난달 말 기업공개(IPO) 준비 회의에서 투자자들에게 “2027년까지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제치고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 1위를 차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CXMT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1503억1000만 위안(약 30조11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73.6% 급증했다. 특히 매출의 64%인 958억 위안(약 19조1900억원)을 중국 본토 밖에서 벌어들였다. 이미 글로벌 공급망 깊숙이 침투했다는 의미다. 지난해 상반기 23억3000만 위안(약 47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던 순손익도 776억500만 위안(약 15조5500억원)의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다.
수익성도 독보적이다. CXMT의 2분기 영업이익률은 82%로 SK하이닉스(76%)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70%)을 넘어섰다. 과거와 같은 밀어붙이기식 박리다매가 아니라는 얘기다. 과거 손실을 감수하며 반도체를 찍어내던 중국 기업들이 최근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맞아 10년 만에 적자 꼬리표를 떼고 R&D를 위한 실탄을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미국의 첨단 칩 및 장비 수출 규제에 맞서 중국 기업들은 핵심 부품 우회 조달과 독자 기술 개발로 반격하고 있다”며 “안방 시장과 현금력을 동시에 확보한 중국의 HBM 추격에 대응해 한국 반도체 업계도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큰 위협은 이제부터다. 최근 상하이 증시 상장으로 13조원이 넘는 자금을 추가 확보한 CXMT는 허페이와 상하이 생산기지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애플은 중국 수출용 제품에 CXMT 메모리를 탑재하기 위해 성능 테스트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CXMT는 미국 국방부를 상대로 ‘중국 군사기업 지정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글로벌 공급망 진입 장벽 허물기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