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자산 포트폴리오를 점검하고 직접 주식 매매까지 해주는 시대가 왔다. AI가 리포트 작성 같은 단순 업무를 넘어 고객 맞춤형 투자 전략까지 세우는 ‘투자 전문가’로 거듭나면서 월가 전통 금융맨들의 입지도 흔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지난 10일(현지시간) 금융 AI 스타트업 로고테크놀로지스는 최근 씨티그룹 등 주요 투자은행(IB)으로부터 약 3000만 달러의 전략적 투자를 유치했다. 그간 IB를 상대로 투자설명서나 재무모델 작성을 자동화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성장한 로고의 다음 타깃은 자산관리사다. 고객 포트폴리오와 상담·거래 이력을 분석해 투자 상담까지 자동화해주겠다는 목표다. 로고는 올해 초 기업가치로 2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WSJ은 “월가의 많은 관계자는 AI가 언젠가 전통적인 금융 인력에 대한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왔다”고 전했다. AI가 자료 취합과 요약·정리를 넘어 인간 고유의 판단 영역까지 파고들면서 금융권에서 개인기가 특히 중시되던 자산관리 영역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오픈AI는 10일 금융회사에 특화한 ‘금융서비스용 챗GPT’를 출시했다. 최신 AI 모델에 금융정보 제공업체의 데이터를 결합해 기업 자료 분석부터 재무모델과 고객용 투자설명서까지 만드는 서비스다. 닉 털리 오픈AI 부사장 겸 챗GPT 부문장은 “챗GPT가 애널리스트처럼 조사하고 근거를 들어 결론을 뒷받침하도록 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에는 클라우드 기반 자산관리·핀테크 기업 알트루이스트가 급여명세서와 계좌 등을 분석해 고객별 절세 전략을 마련하는 AI 도구를 공개해 영국 자산운용사들의 주가가 일제히 급락하는 일도 있었다. 제이슨 웽크 알트루이스트 최고경영자(CEO)는 “평범한 수준의 자문으로 수수료를 정당화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앞 월스트리트 거리 표지판. REUTERS=연합뉴스
최종 투자 판단과 책임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미국 금융회사들도 AI를 인력 대체 수단이라기보다 업무 생산성을 높이는 보조 수단으로 받아들이며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세룰리어소시에이츠와 비스타에쿼티파트너스가 운용자산 합계 1조2000억달러 규모의 미국 등록투자자문사(RIA) 68곳을 조사했더니, 회사당 AI 관련 평균 지출은 지난해 23만7000달러에서 올해 49만4000달러로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개인 투자자가 AI를 활용해 투자하는 사례도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말 로이즈뱅킹그룹이 영국 성인 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6%가 금융 관련 조언을 얻기 위해 AI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수백만 명이 연금 설계에 AI를 활용하고 있다”고 짚었다.
AI가 투자 판단을 넘어 매매까지 직접 수행하는 자동매매 프로그램 ‘바이브 트레이딩’도 확산하고 있다. 미국 투자 플랫폼 로빈후드는 지난 5월 외부 AI 에이전트를 연결해 주식 거래를 맡길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로빈후드는 서비스 출시 이후 약 10만 개의 거래 계좌가 개설됐으며 관리 자산은 1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국내 증권사의 AI 투자 서비스 경쟁도 격화하고 있다. KB증권은 개인형퇴직연금(IRP)에서 AI가 투자 종목과 비중을 제안하고 고객이 최종 매매 여부를 결정하는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투자증권과 토스증권은 오픈API(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용자가 AI 등을 활용해 투자 조건을 설정하고 자동으로 매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AI 투자 서비스가 확산할수록 새로운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금융산업규제국(FINRA)은 AI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확신에 찬 어조로 제시해 이용자가 진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환각’ 현상을 경고했다. 자본시장연구원도 알고리즘의 예측 실패와 투자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의 불명확성, 사이버 보안, 학습 데이터의 편향 등을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노성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AI 기반 투자 판단과 관련한 위험을 모니터링하고 리스크를 완화하는 체계를 선제적으로 갖춰야 한다”며 “환각 등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시스템을 격리하거나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고객에게 신속히 알리는 대응 체계를 전사적인 내부통제 절차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