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의 증거를 인멸한 혐의를 받는 광주 광산경찰서 형사과 강력팀장 박모(58) 경감이 지난 7월 8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23) 사건을 부실하게 수사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들이 첫 재판에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광주지법 형사12단독(부장 이승연)은 14일 장윤기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압수수색 영상을 삭제하고 현직 경찰관인 장윤기 부친에게 수사 정보를 제공한 혐의(증거인멸교사·방조, 공무상비밀누설) 등으로 기소된 광주 광산경찰서 형사과 소속 강력팀장 박모(58·구속) 경감과 팀원 A경사에 대해 첫 공판을 열었다.
검찰에 따르면 박 경감과 A경사는 장윤기 사건 발생 이튿날인 지난 5월 6일 오전 장윤기 부친에게 각각 전화해 “장윤기 차량 키를 우리가 갖고 있고, 차는 족구장 옆에 있다”는 등의 사실을 알려줬다. 이들은 또 차량 내부에서 핵심 증거인 케이블타이(40㎝)를 발견하고도 압수하지 않고 방치한 채 장윤기 부친에게 차량을 넘겼다. 수사팀원들은 사건 직후 케이블타이가 범행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전화통화를 하며 “결정적인 증거가 안 들어갔다. 케이블타이. 그거 아무도 모른다. 케이블타이가 만약 들어갔으면 (강간 등 살인) 무조건이다” 등의 대화를 나눴다. 박 경감은 차량 긴급압수수색 당시 촬영한 영상이 공개되면 케이블타이를 송치 자료에서 누락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팀원에게 영상 삭제를 지시했고, 팀원은 영상을 삭제했다. 해당 영상에는 수사팀이 케이블타이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장면이 담겼다.
A경사는 박 경감 지시에 따라 장윤기 부친에게 장윤기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 차량 키를 전달한 혐의를 받는다. 장윤기 부친에게 영장실질심사 일정 등 수사 정보를 장윤기 부친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A경사는 장윤기 부친과 2024년 2월부터 2025년 3월까지 약 1년간 같은 지구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파악됐다.
도심에서 일면식 없는 여고생을 살해한 장윤기(23)가 지난 5월 14일 오전 광주특별시 서부경찰서에서 검찰에 송치되고 있다. 뉴스1
박 경감 등은 장윤기 차량 압수수색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삭제하도록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나머지 공소사실은 모두 부인했다. “장윤기 차량과 주거지 등 정보를 넘긴 것은 적절하지 못했으나, 장윤기의 범행을 은폐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취지다.
박 경감 측 변호인은 “수사 초기 당시 수사팀은 흉기 등 살인의 직접증거 확보를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블타이를 장윤기의 범행과 관련 있는 증거로 생각하지 못했다”며 “검찰이 살인에서 강간 등 살인으로 혐의를 바꾸자 부적절한 조사에 대한 징계를 우려해 영상 삭제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박 경감 등은 나머지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장윤기의 차량과 자택 주소를 장윤기 부친에게 넘긴 책임은 인정하지만, 수색이 종료된 점 등 고의성이 없다”며 “수사 정보 역시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졌거나, 통상 가족에게 알려주는 수준의 정보로서 비밀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의 증거를 인멸한 혐의를 받는 광주 광산경찰서 형사과 강력팀장 박모(58) 경감이 지난 7월 8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 경감 등에 대한 다음 재판은 다음 달 14일 열린다. 장윤기 아버지에 대한 증인신문은 다음 달 28일 진행될 예정이다. 장윤기 차량 압수수색 현장을 촬영하고 박 경감 지시로 영상을 삭제한 수사팀원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진다. 검찰 측의 요청에 장윤기 부친도 재판 증인으로 채택됐다. 장윤기 부친은 사건 직후 장윤기 자택에서 훼손된 리얼돌(사람 형태의 성인용품)과 차량에서 케이블타이 등을 확보해 증거를 인멸하거나 은닉했다. 다만 형법상 친족 특례 규정에 따라 형사처벌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한편 장윤기 사건을 둘러싼 부실수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광주지검과 경찰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이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검찰은 장윤기의 스토킹·성폭행 사건과 살인 사건을 분리 수사하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박성주(60) 전 경찰청 국수본부장 등 전·현직 경찰 지휘부 4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경찰 특수단은 전 광산서장과 형사과장 등 2명을 입건해 수사 중이다.